이번엔 개인적 견해가 아닌 책에서 본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다.

  역사적으로 거대한 국가의 최후에는 항상 수도함락이라는 절차가 따랐다. 물론 내부의 쿠데타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제국은 예외다. 그리고 수도는 단단한 성벽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함락까지는 상당히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이번에 이야기할 내용은 다름아닌 로마제국의 마지막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 관한 것이다.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를 둘러싸고 맞서게 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서방세력과 동방세력의 승부다.


  1453년, 투르크제국의 수많은 병력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앞까지 진군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천년간 고도의 문명을 누리던 도시가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에 해양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가 앞장서서 이단배척을 외치자, 제노바를 시작으로 속속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든다.
  본시 비잔티움이라 불리던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수도로 삼은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고, 그로부터 1123년 후에 이 천년왕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 황제의 이름 역시 콘스탄티누스 11세였다. 그를 굴복시킨 자는 21세의 젊은 나이의 술탄이었던 메메드 2세였다. 선왕인 마흐메트 2세의 업적을 그저 현상유지만 하더라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메메드 2세는, 전대에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성공하면서 일약 투르크제국 역사의 풍운아로 떠올랐다.

  메메드 2세는 병력을 직속부대인 비정규군단, 정규군단, 그리고 투르크제국 최강의 육군부대라는 예니체리 군단으로 나누었고, 그 외에 각지에서 지원하러 온 투르크제국의 봉건주(?)인 파샤'들'의 군대로 편성하였다. 당시 투르크제국은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일종의 호족에 해당하는 자들에게 지배를 맡기는 형태였고, 대부분의 호족은 파샤 가문에서 나왔기에 메메드 2세의 부대는 각각의 퍄샤'들'이 맡게 되었다.
  역대 투르크왕조의 술탄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수차례 공격해왔으나 항상 견고한 성벽과 수비에 밀려 후퇴하곤 하였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은 지휘자가 21세의 전투경험이 없는 젊은이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메메드 2세가 자신있게 내놓은 비밀병기는 다름아닌 '우 루반의 거포'였다. 헝가리의 한 대포전문가가 제작한 이 대포는 포탄의 무게만 600kg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대포였는데, 무게가 무게이니만큼 그 파괴력도 대단하였던 것 같다. 소에 연결하여서 끌게 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밀도록 하는 방식으로 대포를 움직였으며 빗길에 대포가 미끄러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이 모습을 보던 비잔틴제국의 수비병들은 사람보다 소, 소보다 대포가 중요시되어서 움직이는 것에 할 말을 잃었으며, 그만큼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 대포의 개발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메메드 2세는 창과 칼로 전쟁을 벌이는 기사전은 이제 의미가 적어졌다고 판단하여 대포를 곧바로 도입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바다에 인접해 있으며 한쪽은 만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1/3은 육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곳에 5개의 커다란 문이 있었다. 역시 이 5개의 문이 공방전의 최고 요충지가 되었다. 전체가 외성벽과 내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벽의 견고함은 세계최고라 자부하던 성이었다.
  이 성을 전통적인 방식인 기사전쟁으로 벌인다면 공격측에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비측에서 쓰지 않는 대포를 사용한다면, 그것도 새로 개발된 큰 파괴력의 거포를 쓴다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첫 진지를 성벽에서 4km 떨어진 곳에 건설한 젊은 술탄은 수비측의 대포가 무용지물이라는 첩자의 소식에 곧바로 1.6km까지 진지를 옮겼고, 그 다음날에는 400m 앞까지 전진시켰다. 숫자는 공격측이 많으니 수비군이 밖으로 나올리는 없을테고, 400m 거리라면 대포가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하였다.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진군하였지만 주력은 역시 육지였고, 바다에서는 해양국가인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선전한 덕분에 투르크제국은 힘을 쓰지 못하였다. 육지에서는 기세등등하게 몰려드는 투르크군을 맞이해서 높고 견고한 성벽에 의지해 싸우는 비잔틴군이 선전한 덕분에 그럭저럭 버텨나가고 있었다.
  이 균형을 깨뜨린 것은 야음을 틈타서 콘스탄티노플의 한쪽 만에 기습적으로 배를 들여보내는데 성공한 투르크제국의 해군이었다. 하룻밤에 도시 외곽의 1/3을 차단당한 셈이 된 비잔틴제국은 당황하였고, 만을 점거한채로 봉쇄한 투르크제국은 이제 부교를 놓아서 그쪽에서도 대포를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계속되는 공세에도 성벽은 꿋꿋하기만 하였다. 메메드 2세는 소아시아의 광산기술자를 고용해서 지하로를 판 후에 화약으로 성문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이것을 눈치챈 수비군은 독일의 기술자를 고용해서 지하로를 봉쇄하였다.

  50일간 계속된 공세에도 무너지지 않는 도시를 본 여러 장군들은 이제 회군할 것을 젊은 술탄에게 건의하기에 이른다. 선대에도 여럿 있었던 일이니 이것은 수치가 아닌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때 투르크제국의 장군이 일어나 술탄에게 "우리에게는 아직 16만 대군이 건재하며 도시의 2/3을 봉쇄하였습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다음 기회는 몇십년, 몇백년 후가 될 것입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분위기는 급변되었고 메메드 2세는 3일 후에 총공세를 벌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반대하는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 회의의 결과는 성벽 안으로 화살에 매어 쏘아졌으며 수비군 역시 최후의 일전을 각오한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는 제국의 창설자인 콘스탄티누스와 이름이 같은 황제에서 제국이 멸망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이것은 결국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의 상징은 달이었다. 달이 기울지 않는 이상 제국은 망하지 않는다는 미신도 있었는데, 52일째의 밤은 만월이었다. 이제 달이 기울기 시작할 터인지라 수비군의 심정은 착찹하기만 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3시간에 걸친 개기월식이 일어났다. 싸움도 하기 전에 수비군의 사기는 한풀 꺽여있었다.

  53일째 되는 날, 총공세가 펼쳐졌다. 모든 성벽이 전쟁터였으며 역시 주공방향은 5개의 성문이었다.
  비정규군단이 앞장서서 공격했으며 다른 군단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뒤라고 해도 진지에서 성벽까지는 400m임을 생각하라. 술탄은 비정규군단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들의 역할은 수비군의 힘을 소진시키는 것이었다.
  악착같이 달려드는 비정규군단 위로 대포가 마구 쏟아졌다.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쏘아대는 대포에 이곳저곳이 허물어졌고 그곳은 순식간에 수비군에 의해서 메워졌다.

  후퇴를 알리는 청색기가 올라가면서 비정규군이 썰물과 같이 후퇴하고 그 자리를 정규군단이 메웠다. 정식훈련을 받은 군인인지라 대열을 갖추어서 조직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었고, 그 위로는 예외없이 대포가 마구 쏘아졌다. 또한 이 혼란을 틈타 다시 지하갱도를 파내려가 화약을 터뜨려 성문을 허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수비군은 곧바로 성문의 틈을 나무와 양가죽, 흙을 이용해서 막았고, 대포로 무너진 성벽 사이에 난입해 온 100여명의 투르크군 역시 몰아내었다.

  전투개시 5시간째, 다시 청기가 오르자 이번엔 투르크의 최고정예인 예니체리 군단이 전진하였다. 반월도와 둥근 방패로 묘사되는 최고의 군단인 동시에 투르크의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칼과 창, 활을 모두 사용할 줄 알았으며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단련된 전사들이다.  4만명의 예니체리 군단은 공격해 들어가면서 활과 칼을 사용하였고 예외없이 이들의 머리 위에도 대포가 쏟아져 내렸다. 수비군의 피로는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고, 베네치아의 용병대장이 부상으로 쓰러지면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메메드 2세는 말을 몰아 총과 활의 유효거리 안까지 들어와 격려하였고 전군에 총공세령을 다시 내린다. 곧곧에서 성벽을 넘은 투르크군이 성문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비잔틴군은 내성벽으로 후퇴하였다. 여기서 술탄은 진지로 돌아와 개선때 입을 복장을 입었다고 한다.

  7시간째에 내성벽마저 뚫리기 시작하였다. 시내의 민간인들은 성 소피아 성당으로 몰려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대천사 미카엘에게 기도를 하였다. 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된 콘스탄틴누스 11세는 주홍색의 망토를 버리고 백마에서 내려 끝까지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3명의 기사와 함께 수비군에 가담하였고 그것이 황제의 마지막이었다.
  시내는 곧 약탈의 대상이 되었지만 투르크 해군이 육군에게 공적을 빼았기는것이 싫어 비잔틴 해군을 지나친 것이 하나의 희망이었다. 곧 탈주민들이 항구로 몰렸고 침착하게 사람들을 태운 전함은 콘스탄티노플을 뒤로 하고 크레타섬까지 빠져나갔다.

  성 소피아 성당은 메메드 2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식으로 개조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잡혔다. 술탄이 개선할때 그의 말이 지평선으로 사라질때까지 노예와 전리품의 행렬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카톨릭 교황의 대리자는 걸인차림으로 가까스로 빠져나가 로마로 돌아와 십자군의 창설을 주장했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0년 후에 명이 다해 죽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근위대장은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려갔으나 그의 신분을 눈치챈 베네치아 상인들의 도움으로 18개월만에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다.

  오스만 왕조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유럽으로 진군하여 일종의 역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지만, 1456년 헝가리 군대가 베오그라드에서 이들을 물리쳤다. 1529년과 1683년에 비엔나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6세기 절정기의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와 발칸 지역을 포함해 북으로는 유럽의 부다페스트와 오데사까지 그 세력을 미쳤으며, 흑해 주변 지역과 소아시아, 레판토, 아라비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세계적 강대국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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