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벼슬이 맨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에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 라고 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함)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이후 김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잡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王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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