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이 세번에 걸쳐 고려를 공격했지만 대규모 전투를 통해 모두 격퇴하고 동북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났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고려와 요 사이의 전쟁사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정말 이것대로 간단하게 기록할 수 있는 성격의 전쟁이었을까? 과연 고려가 승리한 전쟁인가?
앞으로 세 번에 걸쳐서 거란과 고려의 전쟁사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역사를 보던지 무조건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일은 자제해야 하기에 거란이 어떤 자들인지 알아두는게 좋을 듯 하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거란은 수도 없이 고려를 괴롭히는 이민족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들은 고구려를 이루는 하나의 민족으로써 현재 우리와도 아주 가까운 관계이다.
월드컵 때 이웃이라는 이유로 그토록 응원했던 터키를 이루는 투르크 인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연합국가로서 전체의 1/3이 예맥인이고 나머지는 여진, 거란, 말갈을 주축으로 해서 한족, 몽골, 돌궐(투르크)이 소수 섞여있는 다민족국가였다.
분명 거란은 예맥과 아주 가깝고 만약 고구려가 신라-당의 연합군에 무너지지 않았다면 현재도 소, 야율 등의 성씨를 찾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야율씨는 거란의 왕족이다)
여담으로 자신이 순수 몽골리안임을 알고 싶다면 자신의 새끼발가락을 보라. 순수 몽골리안은 성인이 되면 새끼발가락의 발톱 끝부분이 두개로 갈라져 자란다. 무좀으로 인한 발톱갈라짐과는 다른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본인도 순수한 몽골리안 같다)

  거란인은 고구려의 일원으로서 그 전투력을 인정받는 자들이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 그들은 고구려의 명맥을 잇는다는 기치 아래 거란인들을 통합해 당 왕조에 대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
측천무후 시절에는 당의 동북방을 지키는 요새인 산해관을 돌파해 하북지방을 점령하였고 현재의 북경까지 진출한다.
다급해진 측천무후는 동돌궐의 지배자인 카파칸 카간(지배자를 뜻하는 '칸'의 투르크식 명칭)을 시켜 거란을 배후에서 공격하게 하여 위기를 벗어난다.

  697년에 당은 돌궐과 연합해 거란인들을 대량학살하며 중원에서 몰아내었고, 751년에 안녹산이 이끄는 당군이 요서지방의 거란인들의 영토를 침공하지만 가까스로 격퇴하여 명맥을 유지한다.
그 이후에 당은 혼란기를 겪게 되고, 그 사이에 힘을 키운 거란은 300년 가량의 회복기를 가진 후에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거란을 하나로 통합해 국가의 기본을 만들고, 947년에 요(遙)라는 중국식 국호를 사용하여 국가체제를 정립한다.
요의 주력군은 유목민족에서는 전통적이었던 기마 궁수대로 북서쪽으로 원정을 떠나 선조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돌궐인들을 축출하였고, 926년에는 경쟁국이면서 자신들처럼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던 발해를 멸망시킨다.
요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그들의 생각은 서희와 소손녕 사이의 담판에도 잘 나와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그 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후당의 장군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도와주고 댓가로 유주와 연주(북경), 운주(산서성)를 할양받는다.
938년에 할양받은 북경을 행정수도로 삼게 되는데 이 곳이 송과 요 양국을 계속되는 전쟁으로 몰아넣은 연운 16주이다.
이민족으로서는 최초로 만리장성 안에 땅을 가진 것이며 1368년 명태조 주원장이 입성하기 전까지 계속 이민족의 지배 하에 남게 된다.
여기까지만 봐도 그들이 그저 '힘센 이민족'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들은 명백한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변의 다른 민족과 계속해서 싸우면서 100년 가까이 불패를 자랑하던 요였지만, 그 신화는 고려와의 전쟁과 함께 서서히 무너져내리게 된다.
고려는 형제국인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이유에서 거란족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고, 또한 고구려의 후예로서 그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무감에 계속해서 북진을 시행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북진정책을 고려의 기조로 삼아 1년에 100일 이상은 서경(평양)에 머물 것을 유언으로 남겨 그 의지를 확실하게 하였다.
따라서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난 요와 한반도를 통일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고려 사이의 전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993년에 고려는 현재의 평안도 북쪽에 있는 여진인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요는 자신의 영토 안에 사는 여진인은 요의 백성으로 보호하였으나, 영토 밖의 여진인은 철저히 배척하는 이중정책을 계속하고 있었다. 고려가 공격한 여진의 영토는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판단하고 군사행동에 착수하게 된다.

  고려의 군사행동에 불안을 느낀 요의 소태후(요 성종의 어머니)는 자신의 친척이며 동경 유수인 소손녕에게 고려를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때 소태후가 고려를 상당히 약하게 평가한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럴만한 것이 고구려와 발해가 몰락하면서 예맥인들은 질 좋은 말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으며, 고려군의 주력은 보병이었는데 이는 송과 같았다. 요는 송의 보병을 상대로 100년 가까이 불패를 자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명확히 생각해보면 이는 소태후의 실수이다.
중국은 드넓은 벌판이 많다. 개활지에서 궁기병을 상대하는 보병과, 산성에 틀어박혀 궁기병을 상대하는 보병이 같을 수는 없다.

  어쨌든 소손녕은 소태후의 명을 받들어 80만의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하였다...라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요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체병력이 80만이다. 송의 100만대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 병력을 고려로 돌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아마 소손녕이 자신의 병력이 많음을 과장해서 말하였고, 후에 고려에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그 숫자를 수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80만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동원된 병력은 아마도 10만~15만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소손녕은 그 병력으로 고려와의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봉산군을 기습, 많은 수의 고려군을 포로로 잡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한다.

  고려는 상비군 45,000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수십만의 요군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왔다는 소식에 국론이 양분되었고, 서경 이북을 할양하자는 할지론이 크게 우세하였다.
고려의 성종 또한 유약한 탓에 할지론을 따르기로 하고 백성들이 창고의 식량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였다. 그러고도 남은 곡식은 적이 군량으로 쓰지 못하게 대동강에 버리게 하는 등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하지만 주전파였던 서희와 이지백은 요와 송, 그리고 고려의 3국관계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고 성종을 설득해 요의 사령관인 소손녕과 외교를 시작한다.

  처음에 소손녕은 오로지 항복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에서 사신이 오지를 않자 좀 더 강하게 몰아붙이자는 생각에 안융진을 공격하지만 고려의 중랑장 대도수와 낫장 유방이 지휘하는 수비군에 막혀 별다른 소득없이 물러나게 된다.
이것이 서희와 이지백이 성종을 설득하는데 힘을 실어 주었다.
소손녕은 안융진에서 패배한 후에 본진에서 어서 항복하라고 재촉하기만을 거듭하였고, 고려가 보낸 사신에게 대신을 보내 면담을 하자고 제의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 회담에 참가할 자를 논하던 중에 서희가 나서서 자신이 해보겠다 하였고, 이에 성종은 강 어귀까지 서희를 배웅하며 성공을 빌어주었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를 그린 삽화>

  소손녕이 말한다.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식하였고,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였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므로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서희가 답한다.
"아니다. 우리 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경으로 논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은 다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요?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역시 우리 영토 내에 있는데, 여진이 도적질하여 차지하고 있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영토로 만들어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어찌 관계를 맺지 않겠는가?"

  역사에서는 서희가 담판을 통해 요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땅을 넘겨주게 만들었으니 고려의 대승이라 한다.
하지만 요가 넘겨주기로 한 강동6주(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는 요의 영토가 아니라 반농반목 상태의 여진인들의 땅이다. 따라서 이 때 고려가 요에게서 이 영토를 할양받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요가 노리던 것은 소손녕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와의 외교였던 듯 하다.
양쪽 다 그 목적을 이루었으니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겠는가.

  이렇게 화의에 성공한 고려는 요 조정의 묵인하에 압록강 남쪽의 여진인들을 마음껏 몰아내면서 강동6주를 요새화하기 시작한다.
고려와 요의 관계는 정상화되었지만 강동6주의 요새화가 진행될수록 요의 불안함은 커가기 시작했고, 고려는 요와 약속했던 송과의 외교단절을 시행한다면서 비공식적으로는 계속해서 송과 교류하였다.
게다가 요는 뒤늦게 강동6주가 동여진을 정벌하는데 중요한 길목임을 인식하였고, 결국 2차침공의 씨앗은 이때부터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단 두번의 전투만 있었고 대규모 접전은 없었지만, 치열하게 외교싸움을 전개하며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서로 얻어간 것이 제1차 침입이다.
고려와 요 양국 모두 승리한 Win-Win 정책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후기 - 개인적인 생각으로 '거란의 침입'이라는 말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명백한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었으며, 동북아의 국가정세와 관련된 외교가 복잡하게 얽힌 것이 요의 고려 침공이다.
그러므로 명칭을 '요와 고려의 전쟁사'라고 해야 옳은 말이 되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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