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고려와 대립하던 10~11세기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어찌보면 아주 현실적이었던 요의 성종이 무모하리만치 고려를 굴복시키려고 덤비게 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이고 당시에는 요의 든든한 방패이자 외교관이며 뛰어난 어머니였던 소태후가 바로 그 인물이다.

  야율 씨족과 함께 키타이를 이끌던 소씨 씨족에서 태어난 그녀는 16세에 요 경종과 혼인하여 아들 융서를 얻었으며, 982년에 경종이 급서하자 이제 12살 된 아들 융서(요 성종)를 대신해 29세라는 나이에 섭정을 맡게 된다.
비록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대해 상대적으로 낮은 시기였지만, 유목에 뿌리를 둔 민족에서 여성의 지위는 농경민족에 비하면 아주 높은 편이다.
당의 측천무후나 청의 서태후처럼 권력을 이용한 공포심으로 지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더 경청하며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할 줄 알았던, 그래서 적이었던 송에서도 그녀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으며 현재에 시로도 남아 있다.
뛰어난 인재는 민족에 상관없이 중용하였고, 그 중에 가장 이름을 날린 자는 한족인 '한덕양'이라는 자였다. (이번 내용과는 상관없으니 넘어간다)

  당에서 송으로 이어져서도 계속되던 전쟁은 그녀의 냉철한 판단과 전술로 인해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며 연전연승한다.
항상 소태후는 송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서서 지휘하였으며 그 때마다 대승을 거두었다.
훗날에 '전연의 맹'으로 일컬어진 조약을 맺어 거란족과 한족간의 피를 피로 갚는 악순환을 끊고 그 이후 양국 사이에는 119년에 이르는 평화가 찾아온다.
(이 조약은 나이가 어린 요 성종이 송의 진종을 형이라 불러 의형제를 맺고, 송은 요에게 매년 20만필의 비단과 10만냥의 은을 보내기로 하며 양국간 평화를 다짐한 것인데, 중국 역사상 최대의 굴욕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렇듯 요를 동북아 최강국으로 올려놓은 소태후는 전연의 맹을 이룬지 5년 후에 숨을 거두게 된다.

  그녀가 요의 전면에 등장하며 요는 전쟁에서 불패를 자랑하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족해지는 등 소태후의 정치적 감각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소태후의 이러한 눈부신 업적 때문에, 어머니의 정치감각을 많이 닮았으며 현명한 군주로 널리 알려진 성종은 몇가지 조급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물론 여기서 요는 얻을 것을 다 얻어내었지만, 그녀가 눈을 감은 후 요 성종은 어머니의 업적에 대한 동경과 그것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고려의 굴복에 집착하게 된다.

  제1차 고려 침공이 마무리되고 17년이 지난 1010년에 요는 두 번째로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불륜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서경 도검순사(평양 방어군 사령관)인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하였다.
그러자 고려군에게 몰리던 여진인들이 그 내막을 자세하게 요 성종에게 고했다.
이것을 두고 요에서는 어찌 신하가 주군을 배반하느냐며 하늘을 대신해 죄를 묻겠다며 강조를 압송할 것을 요구하지만 고려에서는 당연히 거절하였고, 결국 역사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양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그저 명목상인 것이며 진짜 목적은 고려와 송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시키고 강동6주를 장악하려는 데에 있었다.

  제1차 고려 침공에서는 후방의 송이 공격할 위험 때문에 10만명 정도를 동원하였지만, 제2차 고려 침공을 시작할 당시에 송은 서하와 무역권을 두고 전쟁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후방의 위험이 그만큼 적었던 요는 40만(문헌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부분 30만~40만으로 기록하고 있다)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요의 전체 군사동원력이 80만정도임을 감안하면 국력의 절반을 고려의 굴복에 투입시킨 것이다.
게다가 요 성종은 이 원정에 친정할 것을 고집했다. 당시 소태후의 상이 끝나지 않은 시기라 여러 대신들이 불길하다며 말렸지만 의견을 모두 일축하고 1010년 11월에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요 성종은 그렇게 어머니인 소태후의 업적을 이으려 한것으로 보인다.


<요의 제2차 고려 침공 경로>

  기세좋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넌 후에 흥화진을 포위할 때까지만 해도 요의 우세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1차 고려 침공때 안융진에서 왜 패배하였는가를 분석하지 못한 것이 커다란 패인이 되고 말았다.

  요는 유목민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유목민족은 전통적으로 기마 궁수대가 강력하다.
고려는 유목민족이 아니지만 예맥인으로써 전해오는 예맥각궁의 전통에 기반을 두었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사거리가 길고 강력한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의 잉글리쉬 롱보우와 비교해보면 둘 다 비슷하지만 근거리에서는 잉글리쉬 롱보우가 관통력이 좋고, 중장거리에서는 예맥각궁이 강력하다)
요에서도 고려의 예맥각궁의 혜택을 어느 정도 받아서 무장했겠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말 위에서 쏘는 활보다 성에서 굳게 디디고 쏘는 활이 더 정확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한국의 성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치'가 특징이다. 성을 쌓을 때 일자로 짓는 것이 아니라 톱니바퀴 모양으로 짓는 것을 '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곽 전면에서 약 60m정도 돌출해 있다.
성에서 방어를 할 때는 당연히 활이 주력이 되는데, 이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성벽에 바짝 붙어 기어오르는 적군이다. 그런 적을 쏘려면 자신도 몸을 완전히 노출시켜야 하기 때문에 위험해지지만, '치'가 있으면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저격할 수 있다.
대신에 이런 공법으로 지으면 단위길이당 건설비용이 높기 때문에 한국의 성은 도시를 둘러싼 나성이 아닌 산성이 주가 된다. 산에 지으면 적절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건설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잇점을 가지고 있다 보니, 요는 불과 3천명이 방어하는 흥화진을 포위하였지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공격은 하지 못하고 포위만 한 상황에서 시간이 지나면 공격측이 점점 불리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흥화진의 방어 책임자는 '양규'를 협박하고 달래보고 하였지만 흔들림이 없자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은 요 성종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강조가 방어하는 통주로 향한다.
이제 고려의 수많은 산성에 포진한 후방의 고려군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수습책으로 20만의 병력을 후방에 배치시키고 나머지 20만으로 공격에 나선다.

당시 고려가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은 상비군이 제1차 침공 당시의 45,000에서 10만으로 늘었으며, 예비군까지 합하면 35만정도의 동원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가 압록강을 건넌 순간 비상동원이 시행된 고려는 통주에서의 전투에 25만을 투입시킨다.
한국의 역사에서 이만한 병력을 동원한 때는 그 이전에 없었고, 그 이후에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없었다.

  보통 전쟁에서의 기본이라 함은 적의 중앙을 돌파한 후에 다시 뒤돌아서 포위, 섬멸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러한 전통에 비추어 보면 요의 기마대는 아주 훌륭한 병기가 되겠지만, 통주에서의 대회전에서 고려는 새로 발명해 낸 무기인 검차를 내세워 요를 당황하게 만든다.
검차는 거대한 수레 앞에 긴 창을 빽빽하게 박은 후에 이것을 보병들이 밀고 나오면서 기병들의 돌진을 저지하고 역으로 종심을 돌파하는데 사용되는 무기이다. 야전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요는, 고려가 검차를 밀고 나오면서 자신들보다 훌륭한 활로 보병을 엄호하자 공격할 수단이 막막해졌다.

  하지만 15세부터 어머니 소태후를 따라 전쟁터를 전전했던 요 성종은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점점 패색이 짙어지자 야간기습을 감행하기로 하고 야율분노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 작전은 예상 외의 대성공이었고,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 한번의 기습으로 고려군의 총사령관인 강조를 사로잡았으며, 명령체계가 무너진 고려군은 대혼란에 빠져 뿔뿔히 흩어져버렸다.
요 성종은 사로잡은 강조에게 요로 귀순하라고 회유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그 자리에서 베어 버렸다고 한다.

  통주를 장악한 요 성종은 흥화진을 방어하던 양규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지만 다시 거절당하자 곧바로 남하해 곽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의를 잃은 곽주의 방어 책임자 조성우는 도주하였고, 이제 개경까지 요의 군사를 막을 고려군은 없었다.
압록강 도하 후 한 달 만에 곽주를, 그리고 다음해 1월에는 개경을 함락시켰다.
수도를 함락시킨 요는 기세좋게 개경의 민가를 모조리 불태우며 기세를 올렸지만 고려는 항복을 하지 않았다.

  요가 상대했던 다른 민족과 국가들은 수도가 점령되면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항복을 하였다.
모든 행정조직과 기관들이 수도에 밀집되어 있어서 수도 점령시에 관리들이 피난을 가더라도 지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항복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옛부터 중국과 달리 한국은 방어의 핵심이 수도가 아닌 수도 근처의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을 생각하라)
앞에서 언급한 '치'의 건설비용 때문에 수도에조차 나성을 쌓지 않고 근처의 산에 산성을 쌓는 것이 한국의 방어전이다. 유일한 나성인 평양성도 고구려의 전성기 때 다른 나라에 위엄을 세운다고 지은 것이고, 실제로 전쟁을 목표로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공성기법이 정교해 현재에도 평양성은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므로 수도를 함락시켜봤자 거기엔 민가뿐이고 실질적인 명령체계는 모두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빠르게 수도를 함락시킨 것이 이제 화근이 되기 시작했다.
기마대의 잇점을 살려 빠르게 남진해서 수도를 점령했지만, 그것에만 신경써서 진군했기 때문에 후방에 수많은 고려군을 놔두고 내려온 것이 문제였다.
통주에서 25만의 고려군이 와해되었지만 그들은 요에 잡히거나 전사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명령체계가 없어 도주한 것이었다. 그 병력이 지역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방어 책임자들에 의해서 재편성되고 있었다.
재편된 고려군이 길게 늘어진 요의 보급선을 유린하며 병참선을 차단하기 시작하였고, 이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작은 규모로 나뉜 20만의 병력도 각개격파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활약한 고려군 장수가 흥화진의 방어 책임자인 양규와 귀주의 별장인 김숙흥(金叔興)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외교에서의 주도권은 다시 고려가 쥐게 되었다.
고려 현종이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데, 그 내용은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 현종이 직접 요를 방문해 문안인사를 올리고 강동6주를 반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켜질리 없는 공허한 약속이겠지만, 요 성종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런 명분이라도 없다면 모든 군사가 전멸할 때까지 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건을 내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명분을 얻은 요 성종은 개경을 점령한지 7일만에 회군을 결정한다.
요로 돌아가는 길에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고려군과 곽구의 애전에서 맞붙어 전투를 시작해 이들을 모두 전멸시킨다.
하지만 그 몇 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기록하고,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병력은 10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후방에 남겨둔 20만의 병력도 보급선 유지를 위해 소규모로 나누었다가 각개격파 당한 터라 대부분 북으로 도주한 뒤였다.

  1011년 2월, 고려군 장수 정성(鄭成)의 지휘 아래 완전히 재편성된 고려군은 북상하는 요의 군대를 추격해 압록강 근처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강동6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고, 동북아는 요의 독주 체제에서 여전히 요가 앞서기는 하지만 고려-요-송의 세력이 그런대로 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바뀌게 되었다.
3개월에 걸친 요의 제2차 고려 침공에서 양측 모두 3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며 사력을 다했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 것임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요의 제2차 고려 침공에서의 승자는 확실히 고려였다.
요로 돌아간 성종은 화친조약을 들어서 집요하게 강동6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지만, 고려 현종은 전혀 듣지 않았으며 요에 친조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1013년에 고려는 요와 국교를 완전히 단절하고 송과의 교류를 공식적으로 다시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1014년과 1016년에 요에서는 압록강 너머로 군사를 보내 흥화진과 통주를 공격하기도 하고, 여진인을 매수해서 경상도 지역의 해안을 교란시키려 하였다.
고려 역시 1015년에 압록강을 방어하기 위해 다리를 짓고 성을 쌓자 이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고, 요에 협력하는 여진인들에게 지속적인 군사압력을 가하였다.

이렇게 제2차 고려 침공 이후 양국의 관계는 적대관계로 돌아섰으며, 이후의 3차 침공 역시 모두 예정된 수순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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