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고려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후, 요의 왕이었던 요 성종(야율융서)은 다시 한번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를 공격할때엔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요 성종은 그 명분을 2차 침공때 고려에서 약속한 '왕이 직접 요로 찾아가 문안인사를 하겠다는 것과 강동6주의 반환' 을 실행하라고 촉구하였다.
물론 지켜질리 없는 약속이었다.

  현종 3년(1012)에 요에서 고려 현종의 친조를 실행하라고 독촉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역사상 국왕이 다른 나라에 친조를 간 전례가 없다며 거절하고, 오히려 강동6주의 수비를 강화시켰다.
현종 6년(1015) 4월, 요의 사신으로 야율행평이 고려로 찾아와서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볼 때 이것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강감찬을 주축으로 하는 전시파는 이것의 부당함을 현종에게 진언하고, 사신 야율행평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것으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은 섰다.

  국경선에서의 긴장감이 최고로 달하였을 때, 요 성종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시도하였다.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실전경험이 풍부한 10만 병력을 편성하고, 보급품도 넉넉하게 준비하여 1018년 12월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소배압은 2차 침공의 사령관이었던 소손녕의 친형으로, 행정관료였던 소손녕과는 달리 야전경험이 많은 무골이었다.

  본인은 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항상 전쟁을 겨울에 하는가? 왜 점점 병력을 적게 편성하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중국은 위진시대부터 둔전을 행하여왔다. 둔전이란 국경 근처에서 평소엔 농사를 짓다가 전시에 군인으로 나서는 것을 말한다.
타국을 침공하려면 물자가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가을에 추수가 끝난 시점이 군량이 가장 많이 확보된다.
게다가 한반도의 특성상 여름엔 장마로 인해 진군이 곤란하다, 봄에는 중국측의 병량도 적을것이고 가을엔 추수를 해야 한다.
겨울의 잇점은 진군에 곤란하지 않으며, 적군의 청야작전이 별 소용이 없게 된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1차 침공에 80만, 2차 침공엔 40만, 그리고 3차 침공때엔 10만을 동원하였다.
침공때마다 병력이 많이 죽어서 적게 편성한 것은 절대 아니다. 1차 침공엔 병력 피해가 많아봤자 1~2만, 2차 침공엔 20만정도였다고 기록되어있다. 1차 침공이 80만이라고 했지만 실제론 6만~10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사자 때문에 적게 편성한 것은 아니다.
당시 요의 국제정세는 안정되어 가는 중이었으니, 3차 침공때에도 50만 이상을 동원한다 해도 무리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고려의 기본전술을 피해를 입으면서 알아간게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도시를 버리고 산악을 바탕으로 한 산성전투와 게릴라 전에는 대규모 병력으로 맞서기 어렵다.

  이렇게 요에서 공격준비를 하는 동안, 고려도 군제를 재편성하여 총력전에 대비한다.
지금까지는 비상시에 예비군을 소집하였지만 이때는 2군6위라는 군제를 채택해 기병1 대 보병3의 비율을 지키면서 45,000명 가량의 상비군을 모집하였다.
전체 군세로 따지면 20만명 정도를 동원할 수 있었던 셈이다. 계속해서 1:3의 비율을 지켰다면 적어도 5만명이 기병이라는 말이 된다.

  고려가 산악지형에서의 전투만을 계속하던 것을 생각해서 요는 10만이라는 비교적 적은 숫자로 침공을 하였고, 따라서 고려는 요의 이런 생각을 다시 거꾸로 찔러서 대규모 회전을 준비한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만큼의 기병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성에서 말타고 싸울 일은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요의 주력군은 경장갑으로 무장한 궁기병이다. 기동성과 집중력에 있어서는 최고이지만 빠르게 달려드는 철기병에는 매우 취약하다.
군세나 편성에서 이미 요는 고려에 밀리고 시작한 셈이다.

  압록강을 건넌 소배압은 고려군이 지루한 장기전을 준비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 헛점을 찔러 속전속결로 수도인 개경을 점령한 후에 고려 국왕을 계속 추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3차 침공때 고려군의 주력은 궁병이 아닌 철기병이다.
소배압의 예상은 완전히 틀렸지만 공격은 크게 받지 않았다. 성이 나올때마다 소배압은 전투를 피해 우회하면서 개경만을 노렸기 때문이다.

  일단 최초의 접전은 역시 흥화진이었고, 여기에서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은 없던 소배압은 서둘러 진격하려고 우회하였다. 하지만 길목에 매복해 있던 강민첨의 13,000 기병대가 그들을 습격해 서막을 승리로 장식한다.
고려사 전문가들은 강감찬이 냇물을 막았다가 터뜨려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은 착오라고 한다. 강감찬의 본진은 흥화진에서 멀리 떨어진 안주 방면에 있었으며, 때는 음력 12월이라 북쪽 지역의 강물은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습을 당했지만 소배압이 입은 병력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계속 성이 나올때마다 우회하며 개경을 향해 급하게 진군하였다.

  요군이 이렇게 진격하자 강민첨의 기병대는 소배압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계속 추격하면서 각 지역의 방어군들과 연합해 잦은 교전을 유도하면서 진격속도를 늦추려고 하였다.
고려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수도를 점령하려는 요와, 그것을 따라가며 저지하려는 고려군 때문에 전쟁은 수도를 향해 서로 달려가는 이상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비록 이 작전이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 덕분에 강감찬은 휘하에 있던 김종현에게 1만 기병을 주어 개경으로 내려보내 수도의 수비를 강화할 수 있었다.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이 하달한 임무와 귀주에서의 싸움을 보아, 강민첨의 기마대는 궁기병이고 김종현의 기병은 중무장기병(철기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민첨의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을 건넌지 한달만에 소배압은 개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도착해서 본 개경의 풍경은 예전과 달랐다. 성 주변의 가옥은 모두 철거하여 주민들은 곡식과 함께 성 안으로 옮겼고, 현종 역시 피난길에 오르지 않고 개경에 남아 방어에 전념하도록 지시하였다.
게다가 개경에 버티고 서 있는 철기병까지.. 소배압은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해봤자 손해라고 생각하고 회군을 결심한다.
요에서 고려의 작전을 연구해서 3차 침공을 하였다면, 고려 역시 요의 작전을 연구해 완벽한 방어진을 편성한 것이다.

  개경에 도착한지 열흘만에 소배압은 회군하기 위해 북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요의 주력에 대항해 편성한 군세와 오히려 우세한 숫자 등등, 무엇 하나 전투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고려군이 귀주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파악한 소배압 역시 평원에서의 회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요의 궁기병은 다른 나라와의 회전에서 패배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강감찬 장군 흉상>

  1019년 2월1일, 양군의 병력은 귀주의 구릉지대에서 격돌한다.
한민족 역사상 흔히 있지 않은 다른 국가를 상대로 하는 평원에서의 회전이며, 동원병력 역시 요에서 10만, 고려에서 15만 정도를 동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구릉지대는 좌우 폭이 4km정도로 넓지 않은 곳이라 다수의 요군 기병대가 고려군을 크게 우회해서 앞뒤로 협공하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이 때문에 양 군 모두 종심이 깊은 대형으로 늘어섰다.

  양쪽 모두 활에는 자신있다. 고려군은 선두에 기병의 돌입을 막기 위한 검차를 세우고 궁병들이 전열해 사격을 시작한다.
요의 궁기병은 자기들 활의 사거리 안까지 말의 기동력으로 돌격한후에 옆으로 달리면서 사격을 한다. 따라서 고려군에게 어느정도 거리까지 돌격할수밖에 없다.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에 궁기병의 선두가 쓰러지지만 그보다 더욱 많은 수가 사거리까지 도약해 사격을 시작하고 이번엔 고려군이 쓰러진다.
요의 궁기병 1열이 이렇게 싸우는 동안에 2열이 다가오고 1열은 뒤로 후퇴해 화살을 보충하였다.

  이 때 요에서 자신들의 기동력을 이용해 기병대가 고려군의 측면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고려군의 부원수 강민첨이 지휘하는 고려군 기병대가 이들에 맞서 달려나가 전장의 좌우측 바깥에서 교전을 벌인다. 끝내 우회기동이 막힌 요군은 본대로 복귀하고 고려군은 반격을 시도하려고 준비한다.
중앙부에서 고려군의 보병단이 검차를 앞세우고 밀고 나오기 시작했다. 검차를 밀고 나오는 병사들을 주변의 보병이 방패로 보호하며 전진하고, 그 뒤에서 궁병이 지원사격을 한다. 검차가 계속 이렇게 밀고 들어오면 요의 장점인 기동성이 발휘될 수 없다.
소배압은 전장에서 배운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장수였고, 이 검차의 전진을 용서하지 않고 집중공격을 가했다.
결국 보병대의 좌우측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한 요의 기병대 때문에, 고려군은 검차를 포기하고 본대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간에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채 활이 교차하고 백병전이 벌어지면서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이기더라도 이긴것이 아닌, 이른바 양패구상의 국면으로 치달아갔다.
전쟁터를 전전한 노련한 장군인 소배압과, 72세의 늙은 몸으로 조국을 위해 투혼을 불사르는 강감찬.
둘 모두 뛰어난 무장이었고 그 때문에 전투는 지루하리만치 팽팽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이 균형을 깨뜨린 것은 강감찬이 개경의 수비를 위해 보냈던 김종현의 1만 철기병이었다.
개경은 이제 안전하다고 여긴 김종현은 현종에게 진언해 병력을 이끌고 귀주로 뒤늦게 달려갔고, 이것은 진군을 허락하겠다는 결정이 늦은 현종의 명령이 오히려 행운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종현이 지휘하는 철기병이 남쪽에서부터 요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면서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졌다. 긴 창과 갑옷으로 무장한 철기병에 대항하기엔, 요의 경기병과 기마궁수대는 너무도 약했고 게다가 뒤에서의 기습이었다.
기병대가 돌진해 요군의 중앙부가 무너지면서 서로간의 기병대끼리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섞여버리면 궁병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강감찬 역시 모든 보병과 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하였다.
마침내 요군의 기다란 종심부가 고려군에 의해 돌파되었고, 이 돌파된 길을 따라 후방까지 달려서 뒤로 돌아 요군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현대전이나 고대전이나 마찬가지지만, 중심부가 돌파되면서 병력이 후방으로 우회해 포위당하면 끝장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요의 군세는 뿔뿔히 흩어져버렸고 소배압 역시 투구와 갑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쳤다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이 귀주대첩으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한국사의 3대 대첩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이 전투가 소배압의 무능함 때문에 패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부대의 기동성과 강점들은 최대로 활용하였으나, 단조로운 구성에 의지한 취약점이 드러나 패배한 것이다.
요 성종은 소배압을 죽여버리겠다며 폭언을 하였지만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자국의 군대의 약점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소배압이 요 성종의 어머니인 소태후의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이 원정 이후 요는 두 번 다시 고려를 무력으로 정벌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석 달 후에 사신을 교환하며 우호관계를 다짐하였다.
무리한 원정으로 인해 국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소태후의 유연하였던 정치력을 물려받은 요 성종의 성격도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동북 아시아에는 100년이 넘게 송-요-고려가 서로 교류하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황금기가 찾아온다.

'읽을거리 > Wh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Blitzkrieg(전격전)  (0) 2004.03.10
치우천왕  (0) 2004.01.02
요의 제2차 고려 침공  (0) 2003.09.24
요의 제1차 고려 침공  (0) 2003.07.24
사복불언(蛇卜不言)  (0) 2003.07.1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