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전쟁 역사상 가장 대규모이며 또한 가장 빨리 끝난 전투를 말하라 하면, 그것은 바로 2차대전 초기의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과 서유럽 점령이다.
1939년 9/1에 폴란드를 침공해 9/27에 항복을 받아냈으며, 1940년 5/9에 네덜란드를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6/22에 프랑스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폴란드 점령에는 4주, 서유럽 장악에는 6주가 걸렸을 뿐이다.
사실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전투의 개념과 군대 편성 등이 싸그리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전격전이라는 것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적의 방어선을 뚫고 후방까지 돌아간 후에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을 말한다.
  전격전에는 3S로 요약되는 기습(Suprise), 속도(Speed), 화력의 우위(Superiority)의 3대 요결이 있다.
기습효과는 선전포고 없는 공격이나 제5열(적국내의 자국 동조세력)의 활동등으로 얻을수 있으며, 빠른시간내에 적진 깊숙히 침투함으로서 적으로 하여금 재편성의 여유를 박탈하고 배후의 중추부에 위협을 가하거나 제압함으로써 대응능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작전의 진행중에는 기본적인 전차포로부터 자주포,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등으로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를 유지한다.
  이전의 섬멸전이 결전을 통하여 적을 포위하거나 장벽에 밀어부쳐서 분쇄하는 개념임에 비하여, 전격전은 압도적인 속도와 화력으로 적군의 통신망과 지휘체계, 동원체계등을 마비시킨후 무력화된 나머지 병력들을 포로로서 '수집'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전투, 특히 1차대전을 살펴보면 전격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부대편성과 개념을 완전히 뒤바꿔야만 했다.
1차대전에서 프랑스가 독일군을 상대로 대규모의 방어를 통해 소모전을 유도하여 이겼기 때문에, 이때까지의 대세는 방어제일주의로 여겨진다. 이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마지노 요새.
  반면에 전격전은 공격 일변도의 방식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기동성이 좋은 군대가 필요하다. 독일은 이것에 착안하여 낙하산을 이용한 공수부대와 기갑군의 편성에 열을 올렸다. 나중에 공수부대는 네덜란드 점령과 크레타 섬 공방전에서 큰 전과를 세우게 된다.

  기갑군은 영국의 군사전문가인 'J.F.C. 풀러'와 '베질 H. 리델하트'가 주장한 것으로, 그들은 전차를 주축으로 하여 빠른 기동성을 확보한 후에 보병을 뒤따르게 하여 점령한 지역을 신속하게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모국인 영국에서는 이 이론이 철저하게 무시당한 반면 독일은 이 이론을 개량하여 엄청난 성과를 거둔다. 독일 전차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은 전차뿐 아니라 차량화 보병과 포병, 공병대까지 포함시켜 신속하게 이동하면서도 전차를 이용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사막의 여우로 불리우는 '에르빈 롬멜'의 말은 기갑부대를 이용한 전격전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 지점에 모든 힘을 집중시켜 강력하게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에 대열의 양 측면을 보호하면서 진격하여, 적이 반격할 틈도 없이 번개처럼 깊숙이 적의 진지를 뚫고 들어간다."

 

1. 전초전

  1939년 9/1,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전까지 갖은 유화정책을 다 쓰며 히틀러를 회유하던 연합군은 이에 분노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9/3에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하지만 연합군은 폴란드가 어느 정도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빠르게 군사력을 개입하지 않았다. 1차대전처럼 방어위주의 전투를 하면서 서서히 소모전을 유도하고, 그동안 연합군은 전세계의 식민지에 있는 군사를 끌어모아 한번에 밀어붙이는 식의 전투를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은 소련을 끌어들여 폴란드를 불과 4주만에 점령하고 분할 통치에 들어가게 된다. 메서슈미트 전투기를 이용해 제공권을 확실히 하고 이들의 엄호 아래 폭격을 퍼부어댔다. 지상군끼리 전투가 벌어지면 슈투카를 이용해 급강하 폭격을 감행하여 전세를 장악했다. 


<BF-109 메서슈미트>

 
<슈투카 폭격기>

  연합군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였지만 독일군에게 있어서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 의한 결과였다. 연합군은 이 때 전격전의 의미를 빨리 깨달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피해는 모두 자신들에게 돌아오고야 만다.

 

2. 독일의 서유럽 장악을 위한 작전.

  최초의 작전회의에서는 부대의 진격에 있어서 마지노 요새의 강력한 방어선이 걸림돌이 되었다. 초반에 연합군의 상당수를 격퇴시켜 벨기에, 네덜란드와 프랑스 북부에 일부의 영토를 얻어낸 후에 영국 본토에 맞설 최소한의 해군, 공군을 마련하는 것이 독일군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정도는 연합군도 예상하고 있어서, 연합군은 벨기에에서 독일군을 요격하기로 하였다. 연합군의 남쪽에는 마지노 요새가 있어서 독일군이 그쪽으로 우회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딜르 강을 주방어선으로 삼고, 기동력이 좋은 부대는 거기에서 40마일 동쪽에 있는 뮤즈 강에서 방어선을 삼기로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연합군이 이 작전을 수행하려면 국경부대를 딜르 강으로 집결시키고 독일군이 도착하기 2~3일 전에 뮤즈 강을 확보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이런 점을 미리 파악한 듯 하다. 딜르 강과 뮤즈 강의 돌파는 빠른 기습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패배한 연합군은 남쪽으로 후퇴해서 솜 강 유역에서 마지노 선의 연장선을 그어놓고 방어전을 펼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독일 수뇌부는 서유럽에서의 완전한 승리는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1차대전 말기에서처럼 교착상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독일군 A집단군 사령관인 게르트 룬트슈테트 장군의 참모장인 에리히 만슈타인이었다.
  그의 계획은 공격의 중점을 독일군의 중추인 A집단군에 맡겨서 벨기에 동부와 룩셈부르크 북부에 위치한 아르덴 삼림지역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페도르 보크가 지휘하는 B집단군은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통해서 연합군의 시선을 뺏는다. 그리고 레예프 장군이 지휘하는 C집단군은 남쪽에서 마지노 요새의 프랑스군을 견제한다.


<기존의 작전(파란 화살표)의 위험을 지적하고 새로운 작전(빨간 화살표)을 구상.
만슈타인이 주장한 이것을 낫질 작전이라고 부른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주장을 단 몇 분만에 모두 소화해내고 그 다음날 새로운 지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그 지령에 의해서 모든 부대가 재편성되고 주둔지와 공격방향이 싸그리 수정되었다. 독일군 내부에서 '지헬슈니트'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번역하자면 '낫질 작전'으로 통한다.

  전장이 될 서유럽의 가장 북쪽에서는 페도르 보크의 B집단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공격한다. 연합군의 모든 시선을 이곳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요란하면서도 화려하게 전투를 치뤄야 한다.
  가장 남쪽에서는 레예프의 C집단군이 마지노 요새를 견제한다. 함락이나 돌파를 원하는게 아니라 그곳을 통한 독일 영토로의 역습을 막으며 원거리 포격으로만 일관한다.
  그리고 주공이 될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그 중간에서 은밀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아르덴 삼림지대를 통과하여 스당으로 진격한다.
  이 부대들을 지원하기 위해 몇몇 부대를 뒤따르게 해서 유연하면서도 일관성있는 작전을 구사한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부대부터 차례대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B집단군 -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 공격. 적의 시선을 끈다. 3개 군단으로 편성.
A집단군 - 신속하게 예상하지 못한 지점을 통과해 후방을 노린다. 5개 기갑사단과 4개 차량화 사단으로 편성.
C집단군 - 현재는 적을 견제하며 나중에 A집단군이 프랑스 후방으로 진격하면 마지노를 포위공격한다.

 

  3. 독일군의 편성

  A집단군의 클라이스트는 직속부대로 5개 기갑사단과 4개 차량화사단을 거느린다. 일명 전차군단이다.
그의 휘하에는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 게오르그 한스 라인하르트의 제41군단, 구스타프 비터샤임의 제14차량화군단이 있다.
그리고 클라이스트를 지원해주기 위해 헤르만 호트의 제15군단이 따라붙는다. 이 부대는 2개의 기갑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사단에는 평균적으로 250대의 전차가 배치된다.

  B집단군의 페도르 보크는 3개 군단을 거느린다. 여기는 공병부대이다.
그의 휘하에는 쿠르트 슈트텐트의 제7공수단 4천명의 낙하산병이 있고 대규모의 공군부대가 이를 지원한다.

  C집단군의 레예프는 4개 군단을 거느린다. 이것은 포병부대이다.
대 요새포를 위주로 구성한 1개 포병군단과 대전차포와 대공포로 이루어진 2개 군단, 그리고 1개군단 산하의 5개 보병사단이 배치되었다.

  앞의 집단군에 들지 않는 독립군단은 앞의 부대들이 진격하면 곧바로 뒤따르며 그 지역을 제압하며 통로를 개척한다. 그리고 극히 일부만이 남아 주둔하며 지역방어를 담당한다.

 

  4. 개전

  1940년 5/10, B집단군의 쿠르트 슈트텐트의 낙하산 부대가 헤이그, 로테르담, 위트레흐트에 공수되었다. 비록 이 부대는 강력한 저항에 막혀 실패했지만 연합군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번에도 연합군은 폴란드에서처럼, 네덜란드가 최소 2주정도는 방어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새로운 교리인 전격전을 유감없이 펼치게 된다.

  B집단군의 중심부대가 곧바로 브레다와 로테르담으로 진격해 네덜란드군을 포위하였다. 이미 독일군은 전차와 차량 위주의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기에 이동력에 있어서는 최고였다. 로테르담 포위에 성공한 때, 독일 공군은 벨기에 공습에 나서서 공중 살상공격을 감행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5/11, 네덜란드의 중심 방위선인 Peel Line이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5/13에 독일군은 로테르담의 대규모 공습에 나섰다. 다음 날인 5/14에 네덜란드 여왕은 영국으로 망명하고 네덜란드는 독일에 항복하였다.
  연합군은 네덜란드가 2주를 버텨주길 바랐지만, 불과 4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5/10에 있었던 벨기에 공습 후, 곧바로 B집단군 중심부대의 일부가 벨기에 국경을 넘어서 리에주 공격에 나섰다. 불과 77명의 낙하산병에 의해 에반 에바일 요새가 점거당하고 인근의 부대는 곧이어 들이닥친 보병에 항복하였다.
  5/12에 연합군은 작전대로 벨기에에서 반격에 들어갔지만 하늘에서 날아드는 슈투카 폭격기의 정밀폭격과 전차를 앞세운 공격에 순식간에 방어진을 돌파당하였다.
  다음날인 5/13, 독일군은 앤트워프를 함락시켰고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브레타로 철수하였다.

  B집단군이 이렇게 연합군의 이목을 끌고 있을때, A집단군은 아르덴 삼림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독일이 기갑군으로 편성한데 비해서, 연합군은 그것에 대항할 대전차포와 대공포가 부족하였다. 독일 공군은 철도와 도로, 군 집결지를 폭격하며 육군과 보조를 맞춰 진격하면서 육군의 측면을 보호하고 적 전차를 저지하였다.
  개전 1주일만에 공중을 장악해 버린 덕분에 구데리안의 부대는 큰 어려움 없이 스당에 무혈입성하여 뮤즈 강 북쪽을 확보하게 된다. 이 날이 바로 B집단군이 앤트워프를 점령한 그 날이다.

  5/14 새벽에 구데리안의 부대가 뮤즈 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건너편의 프랑스 군에게 슈투카로 폭격을 가하며 그것을 탄약방패로 삼아 오후 4시에 도하를 완료하였고, 자정에는 남쪽 6마일 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동안 A집단군의 라인하르트는 몽떼르메에서 강을 건너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프랑스 군이 이쪽에 수비군을 많이 보낸 탓에 더 이상의 전진이 어려워졌다.
  같은 시각, A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따라붙은 헤르만 호트의 제15기갑군단 산하 제7사단(부대장: 에르빈 롬멜)이 라인하르트의 25마일 북쪽에 있는 디낭에서 도하에 성공하였다.

  북쪽 국경 전체에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프랑스군은 고육지책으로 주요교량과 도로, 독일군의 거점을 폭격하려 했지만 독일의 대공포에 저지당하고 만다. 그러자 구데리안은 즉시 제1, 제2기갑사단에게 프랑스군이 방어선을 다시 갖추기 전에 그곳을 돌파하고 영국해협으로 돌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군은 뮤즈 강 유역에서 독일군을 막아야 함을 알고 군을 집결시켰지만, 북쪽에서 롬멜이 디낭을 도하한 탓에 측면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막고자 뒤로 후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후퇴지점에 이미 구데리안의 제1기갑사단이 도착하여 있었고, 결국 프랑스 군은 뮤즈 강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에르빈 롬멜이 디낭을 도하해서 프랑스 군이 뮤즈 강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라인하르트의 부대를 막고 있던 수비군이 사라지게 되었다. 방어군이 사라짐을 확인하자 라인하르트의 부대가 롬멜의 부대를 따라서 최고속도로 진격하며 프랑스 국경에 60마일 넓이의 전차통로를 확보하였고, 여기를 통해서 독일 보병들이 프랑스로 진격해 들어오게 되었다.
  연합군 총사령관인 가믈랭 장군은 프랑스 제6군단으로 하여금 제2군단과 제9군단 사이에 뚫린 60마일의 간격을 엄호하게 명령하였지만, 이미 독일군의 기세를 막을 수 없게 되었으며 막을만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1차대전을 기억하고 있는 프랑스 국민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는 전쟁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불과 이틀만에 프랑스 국경이 무너졌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구데리안의 부대는 스당에서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5/19일에 솜 강을 넘어섰다. 16일부터 19일까지 3일만에 80마일을 달린 셈이다.
  5/19에 프랑스의 샤를 드골 장군이 제4장갑사단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지만, 집중공격을 받고 그대로 대패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계속 되는 패배에 책임을 물어 총사령관을 가믈랭에서 웨이강으로 교체하였다.
  다음 날인 5/20, 제1기갑군이 아미엥을 점령하고 저녁에 누아이엘을 통과해 대서양 해안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개전 열흘만에 연합군의 부대는 두동강이 나 버렸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나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같은 날인 5/20, 에르빈 롬멜의 부대가 아라스에서 영국군에 대승을 거두고 계속해서 진격하였다. 이 때 롬멜은 전차 뒤로 보병과 포병을 뒤따르게 하면서 전진하였는데, 영국 원정군 사령관인 고트 장군이 이들을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다.
  게다가 이번엔 많은 수의 전차를 집결시켜 롬멜에 맞섰는데, 독일의 33mm 대전차포로는 영국의 마틸다 전차를 상대하기 어려웠다. 많은 피해를 입은 끝에 결국 롬멜이 88mm 대공포를 동원해 영국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독일군도 너무나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것이 2차대전 최초의 전차전이었고 무승부로 끝났지만, 영국은 당장의 피해에만 집착하고 그대로 후퇴해버리고 말았다.

  5/22일 구데리안의 부대가 아브빌과 해안지방을 출발해서 영국해협의 모든 항구를 목표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B집단군이 남서쪽으로 해안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고 A집단군의 라인하르트는 기갑사단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전진하는 중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목표는 프랑스의 북부 해안지방의 장악에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연합군에게는 이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5/23에 구데리안의 부대가 칼레를 격리시키고 됭케르크에서 10마일 떨어진 그라블린까지 진격하였다. 라인하르트는 됭케르크에서 남서쪽으로 25마일 떨어진 바세 운하에 도착하여 봉쇄함으로써, 됭케르크는 연합군이 철수할 수 있는 마지막 항구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라스에서 계속 북진하면서 압력을 가하는 롬멜의 부대때문에 영국 원정군의 우측 대열이 낙오해버리고 나머지만이 벨기에로 후퇴할 수 있었다.
  B집단군이 벨기에의 목을 계속 죄어들어오자 5/28일에 레오폴드 벨기에 국왕은 독일에 항복하였다.

 

  5. 연합군의 후퇴

  됭케르크를 제외한 북쪽의 모든 항구가 독일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연합군은 필사의 탈출을 위해 됭케르크로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때, 돌연 히틀러는 됭케르크로의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까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모두가 의문을 품은 명령이었다.

  유력한 답으로 떠오른 추측중에는 영국군이 결사 항전시 극심한 피해가 예상되어, 차후 작전을 위하여 기계화부대의 전투력 보존하기 위함이라는 설, 공군 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이 공군만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한 의견을 수용한 것이라는 설, 바다를 건너간 영국군보다는 대륙의 프랑스가 우선이라는 설, 그토록 주장하던 독일인의 우월성과 신사도를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설 등등이 있다. 


<됭케르크 항구에서 철수를 위해 승선해 있는 연합군>

  이유야 어찌되었든 연합군은 도하를 시작하였고, 5/24에 히틀러가 공격중지 명령을 철회하였지만 주력군인 A집단군은 이미 남쪽으로 이동한터라 곧바로 대규모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독일 공군은 5/29까지 공격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후 공격의 강도를 점점 높인 탓에 연합군은 주간 탈출을 포기해야만 했다. 6/4에 B집단군의 일부 병력이 남아 됭케르크를 점령하였다.
  338,000명이 됭케르크를 통해 영국으로 탈출하였는데 이 중에 120,000명이 프랑스군이었다. 후퇴하면서 기본적인 개인화기조차 버리고 도망가는 자가 많았고, 부피가 큰 대부분의 무기들은 버려져서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3주만에 영국군은 8개 사단 68,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프랑스는 전체의 1/3인 30개 사단을 잃었으며, 네덜란드군과 벨기에군은 전멸했다.
그에 비해서 독일군의 피해는 전사 27,000명에 실종자와 부상자를 다 합해도 6만명의 사상자에 불과하였다.

 

  6. 프랑스의 항복

  됭케르크 점령 이후 독일군은 부대를 다시 재편성하여 프랑스를 완전 점령하기 위한 공격에 나섰다. 생존해 있는 장갑사단과 차량화사단을 결합해서 새로운 기갑군단을 조직하여 고속군대로 재편성하였다.
  구데리안은 그 공을 인정해 진급시켜 2개의 기갑군단을 맡겨 스위스 국경으로 향하게 하였다.
  클라이스트에게는 2개 기갑군단을 주어, 솜 강을 건너 마지노 요새를 C집단군과 협공하여 격멸하고 남하하게 하였다.
  또한 호트에게도 원래 이끌던 지원부대에 기갑군단을 더해서 아미엥과 바다 사이에서 프랑스 중심부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롬멜은 당시 클라이스트 산하의 부대의 사단장이었기에 솜 강을 건너서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진격속도가 너무나도 빠른 탓에 연합군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곳곳에서 나타나곤 했다. 프랑스군은 그를 두려워하며 롬멜의 부대를 '유령부대'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롬멜의 명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프랑스 군에게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6/10에 독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버지니아 대학의 학위 수여식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웃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는 말로 이탈리아를 비난하였다.

  6/17에는 구데리안이 이끄는 부대가 마지노 요새의 후방에 다다랐다. 곧바로 C집단군과의 협공을 시작하였고, 이미 C집단군에 의해 지상에 노출된 요새포가 모두 파괴당하고 출입구는 봉쇄된채로 적군을 기다리기만 했던 요새 수비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50억 프랑을 투자해서 프랑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던 마지노 요새는 순식간에 프랑스군의 무덤이 되어버렸고, 요새 안에 있던 50만명의 프랑스군은 그대로 항복하였다. 


<휴전 조약에 서명하는 프랑스의 샤를 욍치제르(Charles Huntziger) 대장>

  한편 6/14에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했고 6/16일에는 론 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프랑스는 휴전을 요구했고 6/17에 프랑스의 레노가 사임하고 페텡 원수가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독일군은 루아스 강을 넘어 계속 진군하였다.
  6/22에 독일은 프랑스의 휴전 조건을 받아들였는데, 휴전협정의 조인은 1918년 1차대전에 패한 독일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했던 콩피에뉴 숲의 열차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6/25, 양측은 전쟁을 멈추었다. 현대의 전쟁역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큰 군사적 승리가 히틀러에 의해 단 6주만에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의 무덤을 방문한 히틀러.
그는 나폴레옹처럼 소련 침공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읽을거리 > Wh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  (0) 2004.07.03
중국의 창조신화와 신  (0) 2004.05.30
치우천왕  (0) 2004.01.02
요의 제3차 고려 침공  (0) 2003.11.25
요의 제2차 고려 침공  (0) 2003.09.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