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창조 신화와 그에 연관된 신들.

  반고(盤古)
  반고는 1만 8천년을 잠만 자다가 도끼로 잠자던 우주의 껍질을 깨었다. 가벼운 물질은 위로 올라가고, 묵직한 것은 아래로 가라앉았다. 서로가 붙으려고 하는 것을 반고가 가벼운 물질을 손으로 쳐들고, 무거운 것을 발로 밟아 자기의 키를 하루에 1장(丈,약 3m)씩 키워 자기 키를 1만 8천년을 늘려 천지간의 거리가 9만 리가 되었다.
  그리고는 반고가 쓰러졌다. 그가 헐떡거리는 입김은 하늘의 구름이 되고, 그가 지른 고함은 뇌성벽력, 번갯불을 만들었다. 반고는 죽으며 왼쪽 눈알로 태양을 만들고 오른쪽 눈알로 달과 별로 변화시켰다. 피는 큰 바다와 호수의 물이 되었고, 뼈다귀는 산맥, 털은 식물이 되었다. 그의 땀과 눈물은 아침 이슬이 되었다.

  여와
  반고가 천지를 창조하고 많은 날이 흘렀다. 여와라는 신이 심심해서 땅에 내려와 봤더니, 인간만이 없더라는 것이다.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래, 저런 걸 만들어 주자'하고 누런 진흙을 빚어서 애를 낳았다. 몇 개를 더 만들었으나 성이 안찼던지, 한가닥 칡넝쿨을 잘라 그것으로 진흙을 휘갈겨 진흙방울이 사방으로 튀어나간 그것이 죄다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물의 신 공공(共工)과 불의 신 축융(祝融) 간에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졌는데, 공공은 제 성질을 못 참아 부주산(不周山)에 박치기 했다. 그로 인해 땅이 기울어져 난리가 났다. 물이 들끓어 홍수가 나고, 덩달아 흥분한 괴수들이 사람들을 해쳤다.
  사람을 만든 여와가 분주히 물을 퍼내어 인명을 구출하는 한편 괴수를 퇴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고장난 하늘 구멍에 오색 돌을 갈아 메워서 고치고, 기울어진 땅을 바로잡기 위해 바다에 사는 거북이에게 네 다리를 얻어 그것으로 사방의 땅을 고여 바로잡아놨다.
  좀 서두르는 바람에 중국의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우묵하게 낮은 이유가 되었다.

  신예(神羿)
  세상의 동쪽 끝에 아주 높은 뽕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 그늘에 천제(天帝)의 아들 열 명이 있었다. 그들은 다리가 셋 달린 황금 새였다. 하루에 한 놈씩 번갈아 가며 하늘에 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태양이라 하였다.
  천제의 아들들이 장난기가 발동해 열 명이 한꺼번에 날아버렸다. 하늘과 땅이 펄펄 끓고, 농작물은 타죽고,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지상의 성왕인 요(堯)가 천제께 빌어 천제는 천신(天神) 예에게 특명을 내렸다. 신예는 자기아내 상아와 함께 지상에 내려와 황금새를 사냥하기 시작하였다. 화살 열개중 하나를 요임금이 감춰 다행히도 하나의 태양은 남게 되었다. 괴조, 요괴, 구렁이를 죽였다.
  천제는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고하여 신(神)의 자격을 박탈하고, 인간이 되게 하였다. 상아와 신예는 사람이 되었고, 곤륜산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구하였다. 그러나 불사약은 두알 밖에 없었고, 하나를 먹으면 죽지 않고, 두알 다 먹으면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아내 상아는 남편 신예가 잠든 틈에 두알은 다 먹어버렸다. 그러나 천제의 벌을 받아 한 마리 추한 두꺼비가 되어 보름달 속에 뚜렷이 엎드려 있게 되었다.

 

  三皇

  복희 - 포락과 문자를 만든 신
  수인씨는 화식하는 방법의 발명자로서 알려져 있으나, 복희씨 또한 그와 무연 하지는 않다. 그의 이름은 포희(暑羲) 또는 포희(敍羲)라고 쓴다. 이런 이름은 "희생을 길러서 포주(敍廚)에 가득 채운다" 라든가 "희생을 포락(暑烙 - 굽고 지짐)한다" 는 의미로 해석되니까 인간들에게 동물의 고기를 지지고 볶고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한 역(易)의 8괘를 만들어 인간사회의 길흉을 점치고 문자를 발명했으며 그물을 짜서 생선이나 짐승을 잡는 기술을 고안했고, 다시 여와를 아내로 삼아 둘이서 혼인의 예를 정했다고도 전한다.

  수인 - 집과 불을 만든 신
  수인씨(燧人氏)의 이름은 삼황(三皇)의 하나로 헤아려지고 있으나, 여기에 유소씨(有巢氏)를 선행시켜서 인간생활의 진보를 설명하려는 합리적 신화도 있다.
  [한비자]를 보면, 상고시대에는 인간이 적어서 금수충사(禽獸蟲蛇)의 해로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었다. 이때 유소씨가 출현해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그 재해를 피하게 해주었다. 또한 백성이 날것으로 초목의 열매나 조개 등을 먹어서 위장을 해쳐 병에 잘 걸렸다.
  수인은 다시 부싯돌을 사용하여 불을 일으키고, 먹을 것을 익혀서 비린내를 제거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말하자면 인간의 소거생활(巢居生活), 화식생활의 개시를 상징하는 신들이다.

  신농 - 농상업과 의약의 신
  신농(神農)도 삼황의 한 사람으로 헤아려진다. 즉 염제(炎帝)인 신농씨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우선 농업의 신이다.
  염제 즉 태양의 신이기도 한 그는 인간들에게 괭이를 만들어서 땅을 일구는 방법을 가르쳤다. 태양의 광열에 의해서 오곡을 풍요롭게 결실시켜서 인간의 식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태양이 중천에 오르는 한낮을 눈금으로 해서 사람들을 시장에 모이게 하여 교역을 하는 길을 가르쳤다. 이 점에서의 그는 상업의 신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또 의약의 신으로서도 받들어졌다.

  태양은 원래 건강의 원천이므로 태양신인 그가 건강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의약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산야를 헤메다가 신통력을 갖춘 붉은 채찍으로 약초를 때리면서 각자의 풀이 지닌 독성의 유무 라든가 각종 효능을 분별해서 인간의 병치료에 소용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핥아보았기 때문에 장(腸)에 탈나서 그 생명을 회생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신농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운명은 서로 엄청나게 달랐다.
그 중 한명은 다만 [신농의 소녀]라고만 불리었을 뿐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비를 관장하는 관리노릇을 하다가 뒤에 지극한 수련을 닦고 선인이 된 적송자(赤松子)의 선술(仙術)에 반해서 자신도 그 뒤를 쫓아 여선인(女仙人)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딸은 여와(女娲라 했다. 나이가 아직 젊었던 그녀는 어느 날 동해에 목욕하러 나갔다가 그만 큰 파도에 쓸려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 너무도 억울했던 그녀의 영혼은 정위(精衛) 라는 작은 새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발구산 (發鳩山) 이라는 산에서 살았다.
  정위는 자기 명을 앗아버린 동해에 대해 원한을 품고, 가련하게도 끝까지 동해에 대한 보복에 큰 뜻을 품었다. 날마다 서쪽 산에서 조약돌이나 작은 나무가지를 입에 물고 와서는 큰 파도가 밀려오는 동해의 물결 사이에 떨어뜨리며 동해를 메워 버리려고 결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정위전해(精衛塡海), 즉 정위가 바다를 메우려한다는 고사이다. 일반적으로 무모한 일을 기도하여 헛된 고생을 되풀이하는, 소위 도로(徒勞)로 끝나는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 : 도로 아미타불의 그 '도로'이다)
  또 다른 견해로 보자면 일의 성부(成否)를 도외시하고 오직 자신이 세운 뜻밖에 굳건히 매진하다가 죽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한다.

  신농씨의 또 한 딸은 요희라고 했는데, 여와(女와)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정열적인 소녀였다. 나이가 차서 처녀티가 날 무렵, 아직 이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고요산이라는 산 중턱에 예쁘고 가련한 노란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
이 한 그루의 요초(瑤草) 야 말로 그녀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이 풀꽃의 열매를 따먹은 자는 누구나 반드시 이성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린 나이에 죽어간 요희의 운명을 가엾이 여긴 천제가 이윽고 그녀를 사천성에 있는 무산(巫山)으로 보내어 구름과 비의 신으로 봉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아침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구름으로 화하여 산마루 위를 넘나들고 저녁 무렵에는 구슬픈 비가 되어 골짜기와 산기슭을 적셨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품었던 자신의 애달픈 정열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전국시대의 말엽에 초나라 회왕(懷王)과 또 그 뒤의 그의 아들 낭왕(囊王)이 운몽택이란 연못에서 놀다가 고당대(高唐台)에서 잠시 쉬며 잠들었을 때, 그 꿈속에 환영처럼 나타난 무산의 여신 요희가 타는 듯한 정열을 바쳐 사랑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초나라의 궁정 시인 송옥(宋玉)에 의해서 세상에 전해내려오고 있다.

 

  五帝

  -五帝란 누구인가?
  간단히 말하면 중국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다섯명의 제왕(帝王)을 가리킨다.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記)와 세본(世本)의 오제x(五帝x), 대x예기(大X禮記)의 오제덕(五帝德)에서는 황제(黃帝), 전욱, 제곡, 요(堯), 순(舜)을 들고, 제왕세기(帝王世記)에서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을 들고, 그리고 주역(周易)에서는 복희, 신농, 황제, 요, 순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기를 따라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으로 가정한다.

  황제(黃帝)
  황제는 소전(少典)이라는 부족의 자손으로, 성(姓)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소전국의 왕비가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첫째 별을 감싸도는 것을 보고는 그를 잉태하여 24개월 만에 수구에서 황제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헌원의 시대는 신농씨(神農氏 : 고대 제왕의 하나 그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신농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염제(炎帝)라고도 한다.)의 세력이 쇠해져가는 시기였으므로 제후들은 서로 침탈하고 백성을 못살게 굴었으나 신농씨는 이들을 정벌할 힘이 없었다. 이에 헌원은 창과 방패 등 무기의 사용을 익혀서 신농씨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했다. 그 결과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복종했으나, 다만 치우(蚩尤)만은 가장 포악하였으므로 헌원도 그를 토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염제가 제후들을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귀순했다.
헌원은 이후 덕을 닦고, 병사를 정비했으며, 오기(五氣 : 木, 火, 土, 金, 水)를 연구했고, 오곡(기장, 피, 벼, 보리, 콩)을 심어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사방으 토지를 측량, 정리하였다.
또한 곰, 범등의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서 판천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번 싸운 후에야 드디어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황제는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서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염제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이다.
  황제는 하늘로부터 보정(寶鼎 : 제위를 상징하는 보배로운 솥)과 신책(神策 : 점칠 때 쓰는 자잘한 나뭇가지)를 얻었고, 풍후(風后), 역목(力牧), 상선(常先), 대홍(大鴻)을 등용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전욱 고양(颛顼 高陽)
  황제는 헌원의 언덕에 살면서 서릉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유조(처음으로 양잠을 가르침)이다.
유조는 황제의 정실로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천하를 얻었다.

  큰 아들은 현효(玄효), 즉 청양(靑陽)으로서, 청양은 강수(江水)의 제후가 되었다.
  둘째는 창의(昌意)라고 했는데 약수(若水)의 제후가 되었고, 그는 촉산씨의 딸을 아내로 얻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창복(昌僕)이었다. 창복은 고양을 낳았는데, 고양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붕어하자 교산에 장사를 지냈고, 그의 손자이자 창의의 아들인 고양이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전욱이다.

  그는 침착하여 지략에 뛰었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또한 그는 적지를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으며,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신령에 제사를 지냈다.
그는 북쪽으로는 유릉, 남쪽으로는 교지, 서쪽으로는 유사, 동쪽으로는 반목에까지 다다랐다.

  제곡 고신(帝곡 高辛)
  전욱은 궁선이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전욱이 붕어하자 현효의 손자인 고신이 제위에 올랐으니 이 이가 바로 제곡이다.
제곡 고신은 황제의 증손자인데, 고신의 부친은 교극이며, 교극의 부친은 현효이고, 현효의 부친이 바로 황제이다.

  고신은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또한 널리 은덕을 베풀어 남을 이롭게 했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귀가 밝아 먼 곳의 일까지도 잘 알았고, 눈이 밝아 자잘한 일들도 잘 관찰하였다.
그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였고 백성을 절박한 요구를 잘 알았으며, 인자하면서도위엄이 있었고 은혜로우면서도 신의가 있었으며, 깨끗하게 자신을 수양하였으므로 천하가 그에게 순종하였다.

  그는 토지의 산물을 얻어 아껴서 사용하였고, 백성을 정성으로 가르쳐서 그들을 이롭게 이끌었으며, 해와 달의 운행을 헤아려서 역법을 만들어 영송하였고, 귀신으 권위를 이해하여 그들을 공손히 섬겼다. 그의 모습은 매우 온화했고, 덕품은 고상했으며, 행동은 천시에 적합했으며, 의복은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제곡은 대지에 물을 대주는 것처럼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은덕을 천하에 두루 미쳤으므로, 해와 달이 비치고 비바람이 이르는 곳이면 다 그에게 복종하였다.

  요(堯)
  제곡은 진봉씨(陳鋒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 방훈(放勛)을 낳았고, 또 추자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지(摯)를 낳았다. 제곡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지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지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므로 동생인 방훈이 대신 제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요이다.

  그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으며,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만물을 촉촉히 적셔주는 비구름을 보듯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부유하였으나 교만하지 않았고, 존귀했으나 거드름을 피우거나 오만하지 않았으며, 황색의 모자를 쓰고 검은 색의 옷을 입고서 흰 말이 끄는 붉은 마차를 탔다.
  그는 큰 덕을 밝히어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였다. 구족이 화목하게 되자 백관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였고, 백관이 공명정대하니 모든 제후국이 화합하였다.

  요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춘분, 하지, 추분, 동지를 정하였다.
1년을 366일로 정하고,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이용하여 사계절의 오차를 바로잡았다.
요는 백관들을 계칙하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업적이 다 올라갔다.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가 덕이 없음을 알고, 적당한 후계자를 찾았다. 결국 순을 찾았고 그에게 두 딸을 시집 보내었다. 순은 등용된 뒤, 요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였다.
  순은 계절과 한 달의 날짜를 바로 잡았고 하루의 시각을 바르게 정했고,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오례를 제정하였다. 또한 십이주(십이주 : 기, 연, 청, 서, 형, 양, 상, 양, 웅, 방, 유, 관)를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물길을 잘 통하게 개수하였다.

  요는 제위에 오른지 70년 만에 순을 얻었고, 순에게 천자의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스스로는 은거한 지 20년 만에 순을 하늘에 추천하였다. 요는 은거한 지 28년 만에 붕어하니,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요는 아들 단주가 불초해서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에 권력을 순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순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고 단주만 손해를 보지만, 단주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단주만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요는 "결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하고 한 사람만 이익을 얻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결국은 천하를 순에게 넘겨주었다.

  순(舜)
  요가 붕어하고 삼년상을 마치자, 순은 단주에게 천하를 양보하고 자신은 남하의 남쪽으로 피했으나, 제후들이 조근할 때 단주에게로 가지 않고 순에게 왔으며, 소송을 거는 사람들도 단주가 아니라 순에게로 해결해달라고 왔으며, 소송을 거는 사람들도 단주가 아니라 순에게로 해결해달라고 왔으며, 송덕을 구가하는 자들은 단주가 아닌 순의 공덕을 구가하였다.
  그러자 순은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하며 도성으로 가서 천자의자리에 올랐으니 이 이가 순임금이다.

  우순(虞舜)의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중화의 부친은 고수이고, 고수의 부친은 교우이며, 교우의 부친은 구망, 구망의 부친은 경강, 경강의 부친은 궁선, 궁선의 부친은 전욱, 전욱의 부친은 창의이니, 순에 이르기까지 일곱 대가 흘렀다.
궁선부터 순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지위가 낮은 서민이었다.

  순의 부친 고수는 맹인이었다. 순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매우 오만하였다.
고수는 후처가 낳은 아들을 편애하여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순은 이를 피해서 도망 다녔고, 순이 어쩌다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게 되면 곧 벌을 받았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아버지와 계모에게 순종하며 잘 모셨고, 동생에게도 잘 대했으며, 날마다 날마다 독실하고 성실하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순임금은 우를 천거 받았고, 우는 전국 아홉 개의 산을 개간했고,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하였으며, 아홉 개의 강의 물길을 통하게 했고, 전국 구주를 확정하였다.
  순은 스무살 때 효자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서른 살에는 요임금에게 등용되었으며, 쉰살에는 천자의 일을 대행하였다. 그의 나이 쉰여덟 살 때 요임금이 붕어하자, 예순한 살에 요임금을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제위를 이어 받은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그를 강남의 구의산에 장사 지냈으니, 이곳이 바로 영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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