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유역은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여서 삼국시대에 가장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었었다."
 
이것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사 과정에서 배웠던 내용이다. 하지만 이 한 줄로 그 치열한 역사의 과정을 넘겨버리기엔 너무나도 아깝지 않은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투었던 한강유역. 그 전장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아차산과 풍납토성, 몽촌토성이다. 지하철 8호선에 있는 천호역이 풍납토성이고 몽촌토성은 역 이름으로 남아있다. 5호선을 타고 한강을 북쪽으로 건너면 아차산이 나온다.
  눈치 빠른 사람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세운 전초기지이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백제에서 만든 방어선이 풍납토성이다.

  아차산에 있는 보루 유적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 아직 발굴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보루는 돌을 쌓아 터를 잡고, 그 위에 병사들이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 놓은 시설을 말한다. 현대군의 초소 또는 막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보루를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작은 초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루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산악지역에 있었지만 모든 보루는 말이 다닐 수 있는 마도(馬道)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서로 연결된 수십 개의 보루는 큰 성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아차산에서는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군사유적도 발견되고 있다. 아차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조사되고 있지만, 학자들은 백제군과 고구려군도 시기를 달리하며 아차산성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차산 곳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분(무덤)도 발견되고 있다. 아차산 자체가 수많은 유적을 품고 있는 역사의 보고인 셈이다.

  그렇다면 삼국이 모두 아차산에 그렇게 목숨을 건 이유가 무엇일까? 본인은 월드컵이 끝난 2002년 가을에 직접 아차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다. 아차산은 316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서울의 동부 한강 주변과 광진구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아차산이다. 그 때문에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상당히 좋은 곳이다.


<아차산 중턱에서 광진구 쪽을 바라본 풍경. 한눈에 한강 북부지역이 들어온다>

 
<아차산 용마봉 2, 3보루 원경. 뒤로 보이는 중랑천변은 475년 고구려군이 남하하던 주요 통로> 


<제4보루에서 내려다본 한강. 제4보루의 역할을 암시한다>

  근처 몇km를 모두 정찰한다고 하면, 아차산에서는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인 중랑천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한강지역의 침입자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일 것이다. 지금도 아차산 지역은 군사 요충지다. 그 당시에 아차산에 오르던 때에도 훈련 중인 군인들과 몇 번씩 마주쳤었다.

  다음은 고려대 최종택 교수가 아차산에 대해서 했던 말이다.
  “고구려군은 한강유역을 점령하기 위해 용마봉 옆 중랑천변과 구리 토평쪽 한강변을 통해 남하했습니다. 50년전 북한의 인민군도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위해 같은 루트로 남하했지요.
  아차산 정상 쪽에 있는 헬기 착륙장 등 군사시설이 있는 곳에는 예전에 고구려군의 주둔지였습니다. 아차산은 예나 지금이나 군사적 가치가 높은 셈입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당시에 한강유역을 두고 싸웠던 고구려의 장수왕과 백제의 개로왕에 대한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당시의 상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蓋鹵王) 21년 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두려워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고구려의 대로(對盧:벼슬이름)인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해 7일만에 함락시키고, 연이어 남성(南城)을 공격했다.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개로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과거 개로왕의 신하였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장수 재증걸루 등은 왕을 알아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개로왕은 바둑을 무척 좋아했었고 그것을 알아낸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보내 개로왕과 친해지도록 하였다.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과도한 부역과 역사를 일으킬 것을 개로왕에게 간하였고, 개로왕은 그것을 받아들여 백제의 국고는 비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 장수왕은 어려운 사정의 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과는 위에 짧게 요약한 대로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개로왕은 10년에 걸친 내전을 통한 정변으로 왕에 오른 자다. 고구려의 국력을 두려워하여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었는데, 개로왕은 왕위를 둘러싼 내전때문에 고구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에 고구려가 공격한 곳이 바로 아차산 부근이었고, 이곳이 고구려에 넘어가면 신라로써도 이득이 되지 않았다. 백제는 내전으로 고구려의 공격에 신경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가 백제땅까지 와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백제의 내전은 개로왕의 승리로 끝났고, 이 때 패배한 쪽에서 보복을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훌륭한 장수들이 망명하였다. 그 중에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훗날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되어 개로왕을 사로잡는 공을 세우게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재증걸루가 개로왕을 사로잡은 후에 왕을 대하는 예를 올리고 나서 침을 세번 뱉으며 죄를 꾸짖었다고 하였다. 그 죄란 아마도 정변에 관한 것일 것이다.

  백제군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구의산성을 쌓아 방어진을 만들었다. 백제의 병사는 대부분 창병이었으며 5명이 보루 하나를 맡았고 일정 시간마다 보루를 교대하며 정찰을 하였다.
  반면 고구려는 아차산성에 머물렀는데 그 주력은 보병이 아닌 기마병이었다. 발굴된 유물들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도대체 산성과 토성에서 전투를 하는데 기마병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생각해보다 내린 결론은, 고구려는 소수의 별동대로 백제의 토성을 점거하고 곧바로 기마병을 앞세워 속전속결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백제의 국경은 7일만에 돌파당하고 도성은 곧 함락되고 만다.
  야간을 틈타 고구려의 별동대가 구의산성에 접근한다. 한강의 북쪽을 단번에 장악하는 것이다. 근무조의 교대를 틈타 그들을 기습하고 순식간에 몰아쳐 혼란에 빠뜨린다. 해가 뜰 무렵에는 구의산성은 고구려군의 본대가 점거하게 되고, 곧바로 도하를 하여 풍납토성을 포위한다. 풍납토성이 고립되면 함께 세워진 몽촌토성도 마찬가지 신세가 된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산 위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그 이후는 평지이다. 백제의 도성까지 고구려가 자랑하는 기마대가 질주한다. 대충 이런 시나리오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개로왕이 과연 위에서 말한 도림의 계략에 넘어가 백제를 말아먹은 무능한 왕일까? 우리는 대부분의 역사가 승리한 쪽의 관점에서 쓰여져 왔음을 알고 있다.

  고구려의 남진과 한강유역 진출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진다.
  첫 번째 단계는 4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기로 고국원왕(故國原王)대에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즉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 이전에 고구려는 이미 낙랑과 대방을 축출하는 등 남진을 시도했지만, 서북방에서의 중국 전연(前燕)과 교전에 힘을 소비하는 바람에 백제와의 교전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 시기의 양국간의 국경은 대동강에서 예성강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단계는 4세기말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로, 고구려와 백제는 이 기간동안 예성강과 임진강유역에서 접전을 벌이게 된다. 392년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해 석현성(石峴城) 등 10성을 빼앗았으며, 임진강 하구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켰다. 이후 양국은 관미성과 수곡성(新溪), 패하(禮成江), 청목령(개성 부근), 한산북책(漢山北柵) 등에서 계속 접전을 벌이지만 대부분 고구려가 승리한다.
  장수왕(長壽王) 67년(475)에는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드디어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로부터 한강유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며, 고구려의 점유기간은 나제(羅?濟) 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백제가 되찾는 551년까지의 76년간이 된다.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는 한편, 고구려와의 사이에 요충지인 청목령(靑木嶺: 현재의 개성부근으로 추정됨)에 방벽을 설치하여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北魏)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고구려와 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육로로 보낸 사신은 고구려를 지나다 붙잡혔고, 해로로 보낸 사신은 풍랑으로 인해 북위에 도착할 수 없었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 때문이다.
  개로왕이 고구려의 남침위협에 고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따져보면 선제공격은 백제가 예전에 했던 것이니,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보복전이었던 셈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도성이 공격을 받아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아차산에 있는 장수왕에게 끌려가 그 앞에 무릎꿇렸고, 장수왕은 개로왕의 고구려 침공과 정변에 관해 꾸짖으며 자신의 공격을 정당화시켰다. 그 후 개로왕은 참수당하고 그 시신은 아차산 중턱에 토막내어 버려졌다. 일국의 왕이 살해당하여 무덤도 없이 산에 버려졌다니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개로왕은 왕권강화를 시도하여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을 보면,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뒤의 文周王)와 여곤(餘昆: 文周王의 아우이자 東城王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위시한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인 반면, 당시 백제의 큰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개로왕이 왕궁을 거대하게 짓는 등의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속에서 그들을 배제시킨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는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귀족인 해구(解仇)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중심 정권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만들었고, 그로 인한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로왕이 쓰러지고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이런 내분을 모두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며 화려하게 등장하신 분이 있으니 바로 백제의 25대 왕인 무령대왕이다. (참고로 개로왕은 21대 왕이다)
  후에 한강유역을 수복하며 백제는 두번째 전성기를 누리며 백제문화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백제왕의 왕권강화 정책은 실로 100여년만에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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