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가 케이블영화채널에서 방송되었었다. 한 때 굉장히 재밌게 봤었는데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영화를 보면 멜 깁슨은 윌리엄 월레스라는 스코틀랜드 인으로 등장한다. 연인을 잃은 슬픔을 스코틀랜드 해방을 위해 쓰는 자유투사로 그려지며,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결국 배신당해 처형당한다. 그가 죽은 이후 스코틀랜드는 다시 하나로 뭉쳐서 독립을 쟁취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전투가 궁금해졌다. 분명 영화에서는 잉글랜드는 갑옷과 무기에서 앞서고 체계도 잘 잡혀있었다. 이런 군대가 스코틀랜드의 민병대에게 평야에서 펼쳐진 대회전을 패배하다니? 과연 월레스는 투신이란 말인가. 아니면 잉글랜드의 왕이 무능했는가? 이런 궁금증을 안고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하였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잉글랜드 왕은 무능하지 않았고, 월레스에게는 그와 지휘권을 동등하게 가진 대귀족이 있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1.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관계

  영국의 정식 국가명은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이지만 흔히 Great Britain(브리튼 제도를 다스리는 국가)이라고 부른다. 서구문명의 초석을 닦았던 로마인들은 이곳을 '브리타니아'라고 불렀다. 카이사르가 로마 정치인 최초로 군대를 이끌고 이 땅을 밟았고, 여러 황제들의 정복을 거쳐 로마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물론 브리튼 제도를 다 손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난 후, 중세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던 아더왕의 시대도 지나고, 아더왕이 목숨걸고 막았던 그 이민족들이 정착하여 세운 나라들도 하나하나 정리되며 나타난 왕국이 잉글랜드이다. 간단하게 앵글족의 땅이란 뜻이다. 물론 국민들이 앵글족만 있었던건 아니지만 이름붙는게 전부 이치에 따라 벌어지는 일도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브리튼 섬은 서쪽 귀퉁이에는 웨일즈(혈통상으로는 아더왕의 켈트에 가깝다. 원주민이 서쪽 산악지대로 밀려났다고 보면 쉽다), 한 가운데는 잉글랜드, 북쪽은 스코틀랜드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 옆에 아일랜드도 있으나 이 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자.

  이 세나라는 서로 치고 받기도,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며 이렇게 저렇게 공생했다. 하지만 그것도 13세기까지였다. 최초로 브리튼 연합왕국을 꿈꾼 왕이 나타났으니. 키가 아주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Longshanks(롱샹스 또는 롱샹크)라는 별명이 붙은 에드워드 1세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스코틀랜드를 괴롭히는 아주 탐욕스러운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장한다.
  이 사람은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은데다 심지가 굳고 유능하기까지 해서 주변 여러 나라를 고생시켰다. 웨일즈를 정복한 그에게, 스코틀랜드를 삼킬 기회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2. 스코틀랜드 혼돈의 시작

  롱샹스의 매형이기도 한 스코틀랜드 국왕 알렉산서 3세는 취해 있었다. 아리따운 새 왕비를 만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그는 말을 몰아 35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그녀를 향해 떠났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도 그의 욕망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음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들 국왕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창백한 면모의 목이 부러진 시체의 모습이었다. 1286년 3월 18일, 스코틀랜드는 국왕을 잃었다.

  이제 직계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몸이 병약해서 골골거리는 세살배기 마가렛. '노르웨이 소공녀'로 불리게 된 이 아기는 알렉산더 3세의 딸인 노르웨이 왕비가 출산한 공주, 그러니깐 손녀였다. 여러 귀족들은 그녀에게 보위를 잇게 하기로 합의하고, 그녀가 성장할 때까지는 유력자들의 협의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기로 했다.
  이 일련의 사태에서 기회를 발견한 롱샹스는 이제 겨우 두 살이 된 그의 아들 카나본의 에드워드(나중의 에드워드 2세, 카나본에서 태어났기에 왕이 되기 전까지 이렇게 불렸다)와 노르웨이 소공녀의 결혼을 성사시킨다. 이제 둘이 잘 커서 결혼식을 올리고 사내를 놓아 그 애가 왕이 되면 두 왕국은 자연히 통합될거라는 논리였는데...
  하늘은 그에게 이 돈도 많이 안들고, 병사들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고, 그가 웨일즈에서 지긋지긋하게 경험하던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반란도 상대적으로 적을 이 좋은 방법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소공녀가 스코틀랜드로 오던 도중에 병사해 버린 것이다.

  이제 스코틀랜드 왕관은 무한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여러 방계가 옥좌를 놓고 한판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십수명의 경쟁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갑론을박과 힘자랑은 극에 달하고, 도저히 자기들끼리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고양이에게 생선이 넘어가는 일이 발생했다. 롱샹스에게 왕위결정을 도와달라는 전갈이 날아온 것이었다.
  롱샹스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추려낸 두명, 존 발리올과 로버트 부루스(나중에 왕이 되는 로버트 부루스의 할아버지) 중에 발리올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마 부루스보다 다루기가 쉬울거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과 스코틀랜드 왕의 사이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사위국, 인척국이 속국 수준의 대접을 받게 되는데 롱샹스는 발리올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남부지방에 이것저것 간섭도 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로의 병력차출요구가 스코틀랜드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아마 이것이 롱샹스가 노리던 일일지도 모른다.
  브리튼 통일왕국의 꿈. 아더왕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에게, 한때 아더왕의 이름이었던 브리튼 국왕의 자리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목표였고, 이제 자신이 그걸 이루거나 밑그림을 그려낼 방법은 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력에 자신감이 있는 본인이 빨리 해치우는 것이 후세에도 좋을 것이다. 그는 도화선을 당겼고, 상황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1295년, 발리올은 프랑스와 동맹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96년 3월, 롱샹스는 스코틀랜드로 밀고들어갔다. 여러 내전과 웨일즈 정복전쟁으로 다져진 잉글랜드 군, 제대로 된 대규모 전투경험은 언제인지 기억하기도 힘든 스코틀랜드 군. 그리고 총사령관의 현저한 능력차이도 이제 벌어질 결과를 예측하게 하였다.
  그 해 9월, 롱샹스는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대관식이 벌어지는 '운명의 돌'을 손에 들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이 운명의 돌은 웨스터민스터의 왕좌 아래에 아직도 그대로 놓여있다. 스코틀랜드는 롱샹스가 신뢰하는 서리 백작 존 드 와렌에게 맡겨졌다.

 

<서리 백작의 인장. 각진 그레이트 헬름에 철판이 더해지지 않은 메일을 입고 있다>


3. 스코틀랜드 저항군의 쌍두마차

  월레스 집안은 스튜어트 가문에 봉공(捧供)하는 하급 귀족이었다. 윌리엄에게는 말콤과 존이라는 두 형이 있었다. 알렉산더 3세 아래의 스코틀랜드는 보기 드문 평화의 시대였다. 그 전의 알렉산더 2세 때도 그러했으니 제대로 된 전쟁이라고는 백년도 전인 1138년에 있었다. 물론 나라와 나라가 맞닿은 국경지대에 사소한 분쟁이 없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윌리엄의 아버지는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잉글랜드인에게 살해되었고, 두 형은 1307년에 처형당했다. 영화에서처럼 사제였던 삼촌들이 윌리엄을 교육시킨 것은 사실이다. 정상적인 경로였으면 윌리엄은 아마 군인이나 사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보통 귀족집안의 장남은 대를 잇고 그 아래부터는 군인, 사제직으로 슬그머니 집밖으로 떠밀려났기 때문이다.
  윌리엄 월레스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인기에 비하면 대단히 적은 양인데, 어쨌거나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그가 라낙 지방의 잉글랜드 영주를 살해하고 들고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즈음에는 스코틀랜드의 이곳 저곳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결국 남부는 월레스, 북부는 머레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남서부에서 부루스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도 일어났지만 그들은 롱샹스와의 협상으로 저항의 손을 놓게된다.
  여러 설화에 따르면 영화에서처럼 부인 또는 연인을 잃은 것이 이유가 되었다고 하는데. 누가 아나? 그게 진짜일지.
  영화에서 나오는 초야권은 고대문학(길가메쉬 서사시)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중세 유럽 문학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행해졌다고 보는 역사가는 거의 없다. 귀족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일종의 광고나 자기만족의 방법이었다고 분석한다. 다른 동네에 가서 자기집에 근사한 물건들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앤드류 머레이는 스코틀랜드 북부 모레이의 귀족으로 던바 전투 후에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있던 자이다. 체스터 성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탈출을 했는지 고향으로 돌아가서 저항군을 조직했다. 북부를 중심으로 웰레스와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좀 더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글라스고 주교를 비롯해서 로버트 부루스, 제임스 스튜어트 등 스코틀귀족들도 함께 칼을 빼들었으나, 잉글랜드의 퍼시 경과 클리포드 경에게 포섭되어 잉글랜드 쪽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특히 남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잉글랜드에게 협조하고 있으니, 롱샹스는 이정도쯤은 손쉽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영화에서 기사직에 임명되는 윌리엄 월레스>


4.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롱샹스

  1296년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은 전쟁에 돌입한다. 위에도 얘기했듯이 에드워드 1세 롱샹스(이하 롱샹스)의 소집명령을 무시한 발리올은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며 한판 붙어볼 기세를 잡았다. 그리고 선수를 쳤다. 발리올의 소집에 응한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주축이 된 군대가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했다.


<빨간 화살표는 롱샹스의 진군로,  점선 화살표는 롱샹스의 회군로,
 파란 화살표는 스코틀랜드군의 잉글랜드 북부 침입>

  1296년 당시 가스꼬뉴는 프랑스의 공격을 받고 있고 영불해협도 일촉즉발이었다. 또한 1295년에는 웨일즈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싸움도 해야되고 돈도 걷어야 되고, 이래저래 국내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롱샹스는 눈코뜰새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브리튼 통일왕국을 이룩하여 제2의 아더왕이 되고픈 그의 야망은 한시라도 그 청사진에서 눈을 떼게하지 않았다. 그는 재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어려운 이 상황에서 또 군대를 소집하여 북으로 올라갔다.

  전쟁은 칼로 하는 정치, 정치는 칼 없는 전쟁이라고 했다. 이번 원정 전에 롱샹스가 다져놓은 정치적 공작은 그야말로 이 손쉬웠던 전쟁의 일등공신이었다. 스코틀랜드로 접근한 그의 막사에는 부루스 가문을 비롯한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발리올에게 반대하는 파로써 그를 제대로 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기회에 발리올을 엎어버리고 롱샹스에게 잘보여서 잘하면 스코틀랜드 왕위에나 앉아볼까하는 일종의 기회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꼴을 너무 잘아는 타입일수도 있고.
  이후 왕이 된 후 보여준 롱샹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발리올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만 했다. 결국 롱샹스의 안목은 탁월했다. 그는 잡아먹기 쉬운 상대를 골랐던 것이다.

  버뤽은 그당시 스코틀랜드 무역의 요충지였다. 국경과 가깝고 인구도 많고 번성한 이 대도시는 당연하다는 듯이 롱샹스의 제1번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허술하게 지켜지고 있던 이 곳은 총공격 한번에 함락되었다.
  롱샹스는 본보기로 삼을 셈이었는지(어떤 기록에 따르면 롱샹스의 어린 조카 한명이 수비병의 공격에 전사해서 그가 보복한 것이라고도 함) 버뤽의 성인남자 약 11,000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도시는 곧 잉글랜드 사람들로 다시 채워졌고, 롱샹스는 이곳을 스코틀랜드 지배의 기지로 삼기로 하고 재무관(이라고 쓰고 돈 뜯어내는 놈이라 읽는다)에 휴 크레싱험을 임명했다.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 편에 가담하고 있던 던바 백작의 성을 공격했다. 그때 던바 백작은 롱샹스와 같이 있었는데, 그의 가족 중 한명이 스코틀랜드 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롱샹스는 즉시 서리 백작을 보내 성을 포위했다.
  스코틀랜드 군은 발리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서리 백작이 이끄는 부대와 구원병 사이에 약간의 접촉이 있었으며 스코틀랜드군은 후퇴했다. 던바는 다시 잉글랜드 손에 들어왔다.

  이 원정에서 얘기할 만한 전투는 이걸로 끝이다. 나머지는 그냥 군대가 도착하면 성주가 문을 열고 항복. 거의 모든 성들이 5일을 넘기지 못하고 항복했고, 요지중의 요지인 스털링 성은 롱샹스가 도착했을 때,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롱샹스는 쾌속 순항을 계속했고, 도대체 저항을 하긴 했는지 기록상으로는 도저히 알수 없이 발리올은 항복했다.
  롱샹스는 스코틀랜드 책임자로 서리백작 존 드 와렌을 남겨놓고. 아주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서리백작은 롱샹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5. 스털링 브릿지 전투의 시작

  스털링 브릿지 전투는 전쟁사적으로 볼 때 그렇게 중요한 전투는 아니다. 뛰어난 장수들이 전술의 묘를 다툰 것도 아니요, 전쟁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이 전투가 유명한 것은 역시 자유를 향한 투사, 구국의 영웅이 될 뻔 했던 사나이 윌리엄 월레스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휘한 군대가 정규 잉글랜드 군을 물리쳤다.' 라는 것이 그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었고, 그 사실때문에 신분도 상승했다. (영화에서 멜 깁슨을 기사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유가 된 것이 스털링 브릿지 전투이다)

  먼저 양쪽 지휘관을 살펴보도록 하자.

  잉글랜드 총사령관인 서리 백작은 60대 노장이다. 전쟁 경험은 풍부하다. 헨리 3세 말기의 내전부터 시작해서 웨일즈 전쟁, 1296년 스코틀랜드 원정까지. 하지만 한 전선의 총사령관으로써의 능력이 어떠했는지 말해주는 자료는 없다. 앞에서 잠깐 말했던 던바전투는 사실 전투라기 보다는 소규모 충돌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자료부족
  다음으로, 서리 백작을 대신해서 스코틀랜드를 관리했던 크레싱험. 웨일즈 전쟁에 참전한 기록은 있으나 어느정도 위치에 있었는지, 어떤 경험을 쌓았는지 알수 없다. - 자료부족

  잉글랜드 군은 총병력 6700명. 기병 350과 보병 6350. 기병은 거의 전부 무장된 말을 사용했다. 궁병과 창병의 비율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약간의 석궁병도 존재했다.
  이중에 기병 150, 보병 1850. 전체의 약 1/3인 2000명만이 스털링 브릿지를 통과해 강을 건넜다.

  이제 스코틀랜드 편으로 넘어와서 윌리엄 월레스를 보자. 과거가 불분명한 인물이니 그에 대해서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귀족도 아니면서 상당한 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여러 성들을 해방시키고 다녔고, 머레이가 이끄는 병사들과 합친 숫자긴 하지만 약 6천명이나 끌어모은 것으로 봐서 상당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판단된다. 여러 기록들도 그렇게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정규전을 치룬 기록이나 어떻게 성을 탈취했는지 등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전략전술적 능력은 알수 없다.
  그리고 공동지휘관인 머레이. 북부의 귀족이다. 1296년 롱샹스의 원정에 맞서 싸우긴 했지만, 역시 자료부족으로 그 능력은 알 수 없다.

  스코틀랜드 군 총병력 6580명. 기병 180에 보병 6400. 기병은 대부분 머레이가 제공했다. 머레이를 제외한 어떤 고위 귀족의 이름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병 중에는 창병이 6000, 나머지는 궁병.

  병력은 호각이다. 하지만 그 질은 차이가 크다.
  먼저 기병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잉글랜드 기병의 대부분은 무장이 아주 잘된, 흔히 말하는 중장갑 기병인 반면, 스코틀랜드는 그에 약 반정도 밖에 안되는 수에다가 장갑도 빈약하다. 당시는 기병돌격이 회전의 승패를 갈라놓는 시대이니 이 차이는 엄청나다.
  보병의 경우를 보면, 장비에는 조금 차이가 있겠으나 스코틀랜드 병사들도 여러 소규모 전투를 치뤄왔고, 특히 이들은 나라를 지킨다는 각오로 참전하고 있으니 그 사기는 훨씬 높다 할 수 있다.


6. 개전


<전장인 스털링 브릿지. 지도 한가운데에 다리가 보인다>

  싸움터 선정에 관해서는 월레스와 머레이에 만점을 줘야 한다. 매튜 파리스의 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이곳은 요지중의 요지. 잉글랜드 군이 안 지날래야 안 지날 수 없는 곳이다. 기회가 되면 회전으로 한판 붙고, 아니면 그들의 장기인 게릴라 전으로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멋진 선택.
  반면 서리 백작에겐 별 다른 선택권은 없었으며 있었다고 해도 계속 소극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그가 그것을 택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대를 조달한 서리 백작과 크레싱험은 별다른 저항 없이 록스버러, 에딘버러를 지나서 스털링 성에 도착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머레이는 던디 성을 포위하고 있던 월레스와 합류했다. 잉글랜드 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들은 남부와 북부 스코틀랜드를 잇는 요지인 스털링 성 부근에서 적을 요격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으로 진군했다.

  북부 스코틀랜드로 진입하려던 잉글랜드 군은 강 건너편 야산에 스코틀랜드 군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 사이에는 포스 강이 흐르고 있고, 양쪽 땅을 이어주는 것은 조그만 목조 다리 하나 뿐이었다.
  1297년 9월 11일 아침, 잉글랜드 군은 다리를 건너느라 바빴다. 다리 폭이 너무 좁아서 겨우 기병 둘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지날 수 있을 뿐이었다. 작전회의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 위험성을 역설했지만 서리 백작은 강 건너편의 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눈앞에 있는 다리를 편리하게 이용하기로 결정했던 터였다.

  산속에 숨어있던 스코틀랜드 군도 속속들이 산을 내려와서 진을 짜기 시작했다.
  서리 백작의 여러차례 강화제의를 거절한 월레스와 머레이는 자신들의 눈앞에 벌어지는 그 행운의 현장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잉글랜드 군은 그 좁은 다리를 꾸역꾸역 건너고 있었다. 그것도 일사분란하게 한번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건너다가 말다가, 돌아갔다가 다시 건너고, 도대체 자신들을 꼬이려고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참 전에 포진을 끝낸 그들은 공격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전체 잉글랜드 군의 3분의 1인 약 2,000명이 강을 다 건넜을 무렵 월레스와 머레이는 진격을 명령했다. 고동 소리가 울려퍼지고,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그들은 내달렸다. 곧 적의 화살이 날아들었고 여러 동료들이 양 옆으로 쓰러졌다. 그래도 그들은 달렸다. 그 증오를 창 끝에 집중시킨 채로.

  잉글랜드 군의 저지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그들은 다리의 출구도 빼앗긴 채 뒤로 밀려났다. 삼면은 강, 정면에는 창의 장벽. 잉글랜드 병사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었다. 지휘관들은 조직적인 저항을 위해 여기저기서 호통을 쳐댔지만 벌써 선봉이던 크레싱험의 깃발마저도 꺽여있었다.
  반대편에 있던 잉글랜드 군은 자기편이 허무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무장이 빈약해서 헤엄치는 데 별 문제가 없던 자들은 그래도 강을 건너왔지만 나머지는 전멸했다. 오직 한 무리의 병사들만이 포위망을 뚫고 다리를 넘어오는 데 성공했다. 서리 백작은 다리를 끊으라고 명령하고 퇴각했다.

  영화에서는 돌격하는 잉글랜드군이 가까이 오자 장창을 들어올려 기마대의 예봉을 꺽어놓은 후에, 그 공포스럽다는 하이랜더들의 무작정 돌격 이후 난타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두자.


<스털링 브릿지 전투가 아닌, 훗날의 폴커크 전투에서 벌어진 기병돌격 방어.
폴커크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했지만, 보병으로 적 주력인 기병을 무력화시켰다는 의미가 크다>


7. 전쟁의 결과

  서리 백작은 군사 상식을 위반했으며, 월레스와 머레이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크레싱험은 서리 백작의 잘못된 결정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며 스코틀랜드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잉글랜드 군은 적의 눈앞에서 강을 건너다가 각개격파에 걸렸다. 물론 강을 건너지 않았던 쪽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잉글랜드 군에는 스코틀랜드 귀족들도 참전해 있었다. 서리 백작은 이런 유리함을 활용하기는 커녕 스코틀랜드의 귀족인 런디가 제안한 강 상류를 건넌 별동대를 이용한 배후 교란 작전을 그냥 묵살해 버렸다. 서리 백작은 자신의 함량미달을 유감없이 증명했고, 크레싱험은 죽음으로 그 멍청함을 갚아야 했다. 월레스와 머레이는 승리를 만끽했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잉글랜드 귀족은 거의 없다. 강을 건넜던 모든 기사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크레싱험의 유해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월레스는 그 가죽으로 칼집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서리 백작은 멀리 국경밖으로 도망가버렸고, 거의 모든 성들이 다시 스코틀랜드 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월레스는 기세를 몰아 북부 잉글랜드로 진군해 들어갔다.

  하지만 롱샹스가 가만히 앉아서 스코틀랜드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월레스와 머레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철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다. 롱샹스는 조용히 스코틀랜드인들을 후려칠 철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의 내용과 상관없으니 쓰지 않기로 한다.)


<월레스와 머레이가 이끄는 군대가 포진했던 아비 크레이그에 세워진 기념건축물.
머레이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없고, 월레스만 혼자 새겨져 있다>

  월레스는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기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곧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연합에 참가해 발언하고 힘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는 평민들과 함께 싸워왔으며, 싸우는 이유를 자신들의 밥그릇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 스코틀랜드의 자주독립에 두고 있었다. 이런 그는 종종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과 의견차를 보였고, 끝내는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배신당해 잉글랜드에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윌리엄 월레스가 죽은 후, 로버트 브루스가 규합한 스코틀랜드는 다시금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깃발을 높이 들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 스코틀랜드 귀족 중 그나마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브루스는, 윌리엄 월레스 못지 않은 스코틀랜드의 영웅 중 한사람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다소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는 월레스의 죽음 이후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스스로 스코틀랜드의 왕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베녹번에서 잉글랜드의 군대와 격돌한다. 결전의 날이었던 1314년 6월 24일,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베녹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한다. 영화는 이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오늘날에도 스털링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항쟁의 땅'으로 그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후 스튜어트 왕조(스코틀랜드 출신) 시대에는 영국 왕실이 특히 애착을 보였으며,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1328년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승인한 뒤에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전쟁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다가 결국 1603년에 이르러 두 나라의 왕위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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