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815년 6월 18일 저녁7시30분. 역사를 뒤바꾼 최대의 전투 중 하나였던 워털루 전투가 이제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고 있었다. 몇 시간의 대접전 끝에 나폴레옹이 황실 근위대를 전열로 내보낸다.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동맹군을 물리치기 위한 필사적인 최후의 조치다.
  나폴레옹은 사실 한 번도 큰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어서 어떤 믿음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가 위기를 벗어나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워털루는 그 신화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반적으로 워털루 전투는 웰링턴 공작의 전술의 승리로 여겨진다. 소규모이지만 잘 훈련된 동맹군이 나폴레옹 대군의 노련한 병사들을 크게 물리쳤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패배에 동맹군의 사기와 전술 외에 다른 요인은 없었을까? 워털루의 나폴레옹에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1. 유럽의 정세

  1815년 당시, 유럽은 20년 이상 전쟁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이란 전장 위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 연전연승이 기록되고 나폴레옹을 막을 자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1815년이 되자 오랜 전쟁으로 희생이 더욱 커지면서 유럽의 강국들은 마침내 힘을 합쳐 나폴레옹을 영원히 제거하기로 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대규모 동맹군이 접근해 오자 나폴레옹은 필사적으로 선제공격에 나섰다.

  나폴레옹에겐 시간이 없었다. 평화가 절실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특히 영국군을 격파해야 했다. 머잖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대군이 프랑스로 내려와서 그들이 파리를 함락시키는 날엔 끝이었다.
  그러던 중 1815년 6월 17일 밤에 웰링턴 공작은 나폴레옹군에 맞서 자신이 이끄는 동맹군을 대기시킨다. 벨기에의 북부지방에 있는 브뤼셀의 외곽인 워털루에 자리를 잡고, 영국군과 동맹군 9만 병력은 12만 대군을 자랑하는 나폴레옹 대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동맹군의 희망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과의 연결이었다.
  그러나 18일 새벽까지도 프로이센군은 워털루에서 몇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나폴레옹군이 신속히 움직인다면 승리는 그 쪽으로 기울 것이다. 반면 시간을 끌수록 프로이센군이 때맞춰 도착할 확률은 더욱 커질 것이다. 나폴레옹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2. 웰링턴의 전장 선택

  오늘날 워털루의 그 현장은 번잡한 브뤼셀 교외에서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투가 임박한 긴장의 나날 속에 웰링턴은 현장을 조사하고 나폴레옹을 저지시킬 이상적인 방어 위치를 결정했을 것이다. 웰링턴은 플랑드르에 있는 기간 동안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온다면 어느 쪽에서 올까?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그들을 저지시킬 수 있을까?'

  웰링턴은 지형 파악의 귀재였다. 그가 군대를 배치한 산마루의 능선은 브뤼셀의 대로와 워털루 계곡의 교차점이었다.
  지금은 웰링턴의 위치 선정이 실제로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없다.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풍경이 변한 것이다. 오늘날 그 전투의 현장엔 사자언덕이라고 불리는 인공의 언덕이 서 있다. 수천톤의 흙을 깍아 높이 40m의 이 언덕을 만듦으로써 월털루에서 전사한 벨기에, 네덜란드 군인들에게 기념비를 바친 것이다. 웰링턴은 이를 보고 매우 분노했다고 한다.
  웰링턴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사자언덕이 들어서며 파괴된 워털루의 현장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그 진지를 효율적으로 만든 것은 능선이었다. 능선을 따라 군대를 배치하면 앞으로 경사진 능선 비탈이 적의 포화를 받아 주면서 공격을 방해하는 자연 방해물이 된다. 반면에 능선의 뒷쪽은 쏟아지는 포화로부터 그나마 안전할 것이다.
  사자언덕을 만들기 위해 주변 표토층이 제거된 후 능선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현장을 조사한 고고학자는 1815년 당시의 능선보다 지금이 훨씬 낮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보다 능선이 더 가파르고 높았기 때문에 웰링턴이 이곳을 방어진지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병을 방어할 때의 이야기이고, 계산이 정확한 포병을 만나면 역시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다.


3. 날씨가 전투에 끼친 영향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날 아침, 나폴레옹은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공격을 늦추는 1분, 1초마다 프로이센군이 점점 다가오기 때문이다. 계곡 건너편의 워털루의 능선 위에는 웰링턴 장군이 동맹군을 포진시키고, 전투를 피할 수 없는 프랑스군을 기다린다.
  웰링턴은 그 장소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워털루 능선을 이상적인 방어진지로 생각했을까? 단순히 높은 능선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폴레옹의 포병부대는 정확한 계산으로 포를 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능선이 높아도 고사각으로 쏴버리면 피해를 입을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또 다른 어떤 점이 웰링턴이 워털루를 거점으로 삼게 하였는가?

  워털루를 연구하는 사람 중에는 역사학자 외에 기상학자도 있다. Dennis Wheeler 박사는 그 날의 날씨가 승패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워털루 전투가 벌어진 그 날의 기상학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북해의 항해일지이다. 해군 항해일지에는 방대한 자료가 들어있는데, 매일의 날씨는 물론 매시간의 날씨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기계로 계측한게 아니라 갑판 장교들이 일일이 눈으로 보고 작성한 관찰일지이다. 그래서 매일의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날씨 기록의 중요성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Dennis 박사의 작업으로 완성된 전투 48시간전의 일기도를 보면, 저기압골이 지나면서 워털루 지역에 지형성 강우가 쏟아졌다. 워털루 전투 전날 밤은 밤새도록 비가 왔고, 비는 아침 8~9시 사이가 되어서야 그치고 맑아졌다.
  날씨가 맑아지자 나폴레옹으로써는 가공할 전술을 앞세워 동맹군에 대한 즉각적인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공격은 전형적으로 포병대의 맹포화로 시작을 알린다. 당시 프랑스는 성능이 뛰어난 화기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자랑하는 포병대는 유럽에서 최고를 자랑했다. 그 엄청난 화력은 당시 워털루에서 웰링턴 장군의 부대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침에 비가 그쳤는데도 나폴레옹에겐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워털루의 지형은 아주 입자가 고운 흙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따라서 비가 내리면 질척질척한 진흙으로 변한다.
  만약 50~60km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밤새 내린 비가 금방 빠졌을 것이고, 웰링턴의 부대는 여태껏 프랑스에 대항하던 다른 군대들처럼 그들의 맹포격에 그대로 박살났을 것이다. 워털루는 포병에게 있어서 우천시 전투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웰링턴 장군도 포병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웰링턴보다 나폴레옹이 더 큰 문제를 겪게 되었을까?


4. 워털루에서 양쪽 군대 포병대의 활약

  나폴레옹이 가진 대포는 12파운드짜리로 사관학교에서 포병을 배운 그에겐 아주 좋은 무기였다. 하지만 상당히 무겁기(500kg) 때문에 일반 장정 8명이 달려들어야 이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땅이 단단할 때의 일이다.
  나폴레옹은 흠뻑 젖은 땅 때문에 대포를 움직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프로이센의 협공을 피할 수 있었지만 날씨가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이 땅이 마를때까지 몇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럼 이것이 현명한 조치였을까? 장정 20명을 붙여서라도 대포를 밀고 나가야 했을까? 이 대포를 밀고 나갔더라도 발사때마다 포의 반동때문에 대포를 다시 원위치 시켜야 했을 것이다. 전투에서면 포마다 100발 이상은 쏴댔을 것이고, 진흙밭에서 500kg의 대포를 100번 원위치 시키다가는 병사가 먼저 쓰러지고 만다.

  프랑스의 생리학자는 현대의 프랑스의 포병대 군인 20명을 시켜서 이 대포를 끌고 진흙밭에서 10분동안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젖산이 쌓인 양을 통해 이들이 경험한 피로도를 측정했다. 젖산이 쌓이면 근육이 굳어지고 피로도가 올라간다. 조사결과 단 10분동안 20명이나 달라붙어서 했음에도 젖산치는 최대치였고 심장박동은 분당 180회를 육박했다.
  정예로 훈련된 현대군인이 이정도인데 나폴레옹의 군대는 오죽했을까. 나폴레옹이 부하들에게 대포를 끌고 진흙밭을 전진시켰다면, 그들은 전투를 하기도 전에 쓰러졌을 것이다. 포병대원이 힘이 빠지면 점점 발사속도가 늦춰지고 포병대의 전열이 흐트러진다. 나폴레옹이 이동을 미룬것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본다. 그는 땅이 마르면 자신이 자랑하는 포병대를 전진시켜 전열을 유지하고 상대를 격파해 승리할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마침내 정오 무렵에 프랑스의 포병대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대규모의 집중포화는 나폴레옹의 전형적인 전투개시 방법이었다. 또한 대포에 파열탄을 사용해 능선 뒷쪽에서 터지게 하면서 피해를 극대화시키려 했다. 파열탄은 현대전의 수류탄과 같다. 폭발할 때의 파편으로 인명을 대량살상하는 포탄이다. 하지만 그런 사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포병대는 생각만큼 피해를 주지 못했다.
  계산도 정확하고 타겟으로 똑바로 날아갔는데 왜 피해를 주지 못했을까?

  이번에도 문제는 땅의 상태였다.
  정예포병대 소속이며 포탄 전문가인 Simon West 소령이 실험을 하였다. 1kg의 화약을 넣은 포탄을 15m 앞에 3cm 깊이에 묻었다. 당시의 포탄은 모두 지면에 접촉해야 폭발했기 때문에, 포탄이 날아와서 터진다면 이정도 깊이에서 터질 것이다. 그리고 15m 거리에 커다란 종이장막을 세우고 폭발할 때 어떻게 되는가를 관찰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겨우 3cm 깊이였을 뿐인데, 폭발할때의 시각효과는 같았지만 종이장막에는 구멍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진흙의 강한 점도가 포탄의 힘을 무력화시켰다.
  결국 나폴레옹의 포병대가 날리는 포탄에서 몇발짝만 떨어지면 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웰링턴 군은 능선 뒷쪽에 엎드려서 버티기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의 보병대가 직접 언덕을 기어올라가 전투를 벌여야 한다.

  반면 웰링턴 군은 일반적인 대포가 아닌 다른 포를 가지고 있었다. 일명 불폭탄이라고 불리는 무기인데, 일반 대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면 불폭탄은 직사화기이다. 포탄이 터지면서 파편을 날리는 반면, 불폭탄은 직접 파편을 초속 200m의 속도로 발사한다.
  이 불폭탄을 능선에 걸어두고 기어오르는 프랑스 보병대에 쏴대면 되었다. 50m 앞에 나란히 일렬로 서서 올라오는 적군에 쏘면 최소 10명은 온 몸에 벌집처럼 구멍이 나서 사망하고 만다. 이 불폭탄은 직사화기이므로 땅이 진흙밭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5. 나폴레옹군의 악재

  오후 1시가 되자 나폴레옹은 초조해졌다. 몇시간동안 포격을 했음에도 웰링턴의 군대는 건재했던 것이다. 프로이센군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폴레옹은 더 이상 전면전을 미룰 수 없었다. 그는 보병대에게 전진을 명령했다.
  넓게 펼쳐진 구릉지에서 웰링턴이 위치한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는 엄폐물이 없다. 이들은 그대로 불폭탄의 제물이 되었다. 웰링턴의 포병대에겐 너무나도 손쉬운 타겟이었다. 프랑스의 보병대와 기병대는 대열을 이루어 전진하다가 끔찍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 이 불폭탄을 포격을 피해 올라온 프랑스군을 기다리는 것은 전열을 갖추고 머스킷총을 쓰는 부대였다.
  당시 프랑스가 포병으로 유명했다면 영국은 머스킷총 부대로 유명했다. 일사불란한 일제사격과 빠른 전열의 변경은 영국이 세계에서 최고였다.

  나폴레옹은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평소에도 의사를 옆에 데리고 전투에 나갔을 정도였다. 당시 주치의는 워털루 전투가 벌어진 날에도 그가 계속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상황이 좀 소강상태로 접어든 시간에 2시간정도 자리를 비우고 3km 떨어진 그의 본부인 라송에 갔다.
  나폴레옹은 전투를 믿고 맡길만한 유능한 장군인 네이에게 전투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네이는 전술에서는 최고의 장군이었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써 칼을 뽑아들고 부하들에게 자신을 따르라 외치며 항상 선두에 서는 용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지휘권을 넘겨준 때는 최악의 순간이었다.


6. 네이 원수

  일개 기병으로 입대하여 30세에 장군에 오를 정도로 유능한 인재이다. 35세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군 원수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엘바로 귀양을 갔을 때, 동맹군은 네이를 제거하지 못했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의 뛰어난 전술과 지도력이 아까웠던 것이다. 결국 네이는 프랑스 왕정의 제1사령관이 되었다. 얼마 후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탈출하였다. 동맹국과 프랑스 왕정은 나폴레옹을 어떻게 막을지 참으로 난감했다. 빈손으로 나온 그가 파리로 올라오면서 점점 부대가 커지고 군세가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가장 유능한 장군을 보내 대항하기로 하고 거기에 선택된 사람이 네이였다.
  하지만 네이는 나폴레옹과 대면하자 그에게 달려가 나폴레옹의 장군이 되었고 프랑스 왕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네이가 사라지자 더 이상 그들에 대적할 사령관을 찾지 못했던 탓이다.

  워털루 전투가 있기 3년 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시작했고 실패로 끝났다.
  50만의 정예병이 그들의 황제를 따라 러시아로 들어갔지만, 살아서 돌아온 것은 10%도 되지 않았다. 사망자 대부분은 후퇴중에 게릴라에 당하거나 굶어죽었다. 프랑스의 정예병은 여기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고, 다시 충원할 방법이 별로 없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를 재구성해 승리해 온 것은 오로지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감각때문이다.
  이 러시아 원정에 황실 엘리트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사령관이 네이였다. 원정을 떠날 때엔 가장 선두에 서서 이동했고 원정이 실패하여 후퇴할때엔 가장 마지막에 빠져나왔다. 그의 강인한 체력과 의지력 덕분에 황실 엘리트 부대는 모두 굶어죽거나 저체온증으로 얼어죽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때의 악몽이 강했는지 몰라도,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네이는 아주 무모하고 저돌적이며 쉽게 이성을 잃어버리는 사령관으로 변하고 만다.


7. 네이의 패착

  오후 3시쯤, 네이는 웰링턴 장군의 부대가 있는 능선 위를 바라보았다. 능선의 오른쪽이 비어있다고 본 네이는 동맹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후퇴중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웰링턴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멀리 가는 후퇴가 아니라 약간 뒷쪽으로 이동하는 정도의 재정비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열의 재정비는 영국이 세계에서 최고였다.
  이 장면을 마침 네이가 보았고 그는 착각을 하였다. 웰링턴군이 드디어 흔들리는구나라고... 나폴레옹이 생각하던 전투의 시나리오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네이는 아군의 예상대로 전투가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결전의 시기가 왔고 프랑스 포병대가 적군의 인내력을 깨버렸다고 판단했다.

  네이의 눈을 흐리게 한것이 승리에 대한 열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기회라 여기고 기병대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문제는 이 명령을 자기가 이끄는 기병여단에만 내린게 아니라, 나폴레옹의 직속 기병대에게까지 내린 것이다. 나폴레옹이 전권을 위임했으므로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지금 공격하면 후퇴중인 적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오판한 탓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넓은 평원이 아니다. 2개 연대가 쓰기에도 약간 좁은 곳을 16개 연대에 이르는 모든 부대가 다 사용하려 했으니 서로간에 뒤엉킬수밖에 없다. 네이는 언제나처럼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두르며 달려갔고, 5천기의 기병들이 능선을 올라가는 장면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겪은 가장 큰 규모의 기병대 공격이었다.

  하지만 웰링턴군은 후퇴하지 않았다. 견고하게 사각대형을 이루어 능선을 올라온 기병대를 향해 십자사격을 가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지만, 견고한 사각대형을 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이 스스로 엄청난 판단착오를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이 라송에서 돌아와 이 장면을 보고 "대체 뭣들 하는 짓인가!" 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는 재빨리 일부 보병대와 포병대를 조직해서 기병대의 구원에 나섰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거의 궤멸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폴레옹에겐 재앙이었다. 프로이센군이 점점 다가와 이제 코앞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프랑스군은 영국군뿐만 아니라 프로이센군과도 싸워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병대의 궤멸은 악몽에 가까웠다.


8. 나폴레옹의 몰락

  저녁 6시경, 워털루 전투는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네이가 큰 실수를 했지만, 이제 프로이센군과도 싸워야 하는 나폴레옹은 네이를 신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병대의 돌격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네이는 점점 더 무모하게 작전을 수행한다. 용장이며 나폴레옹의 수하 사령관중에 최고라는 네이가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를 망쳐버렸다. 그는 전투에 점점 더 몰입하면서 주변에 대한 판단력과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네이를 중용하고 전투를 맡겼다. 네이가 이전의 전투에서도 종종 그래왔지만 결과는 괜찮았던 것을 계속 보아왔던 탓이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을 계기로 그는 무모한 작전을 자주 계획하고 수행하였다. 워털루 전투가 있던 날의 행동도 승리를 이끌어내는 사령관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령이나 대위도 침착해야 하는 판에 원수가 이성을 잃었다는 것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제 전장은 두 곳으로 늘어났다. 아직 능선 위의 영국군도 몰아내지 못했는데, 이제 우측에서 프로이센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둘 중에 어디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네이를 이곳에 남기고 자신은 프로이센군을 상대하러 떠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네이는 그렇게나 무너진 프랑스군을 이끌고 웰링턴을 10km 밖까지 몰아낸다. 이성을 잃고 부대는 궤멸되었음을 따져보면 정말 놀라운 분전이다. 이런 능력을 알기 때문에 네이를 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건재했다. 전투를 치르지 않고 이제 막 도착한 싱싱한 부대인지라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군이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프로이센군의 자랑은 조직력이다. 네이가 영국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내고 나폴레옹과 합류했지만, 나폴레옹의 전술과 네이의 용맹함을 합해도 너무나 힘든 싸움이었다.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하였다. 그는 도주하거나 후퇴하지 않고 자신의 본부인 라송으로 가서 프랑스 황제 의복을 입고 앉아서 동맹군을 기다렸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혀 총살형을 당한 후 병원에 이송된 네이 원수의 시신>

  이후는 다들 알다시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나고, 프랑스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유럽의 역사는 개혁에서 보수로 바뀌고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가장 큰 세력으로, 프로이센은 신흥 강대국으로 비상한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에 나타나 유럽을 개혁과 진보의 물결로 휩쓸었지만, 지나치게 잦은 전쟁과 나폴레옹의 야망으로 인해 프랑스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었다.
  프랑스 내에서는 나폴레옹을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처럼 대단한 인물로 보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유럽에 뿌린 씨앗은 굉장히 크게 자라났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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