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한 연쇄살인사건 영화 <혈의 누(血의 淚)>가 화제를 모았었다. '혈의 누'라는 제목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제목과 같아 낯설지 않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 영화가 이전의 역사관련 영화가 해소하지 못했던 '역사고증' 문제를 상당부분 해소한 듯 하기 때문이다.


  1. 영화 '혈의 누', 한층 좋아진 역사고증

  제대로 된 '역사고증'의 첫 번째가 '안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에는 안경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 초반, 군관으로 등장하는 차승원은 시체 검안 시 동그란 안경을 쓰고 검안 과정을 세밀히 살핀다.


<천리경과 함께 안경의 사용은 조선후기에 널리 보급되어 흐린 눈을 밝혀주었다>

  지금은 어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옳은 것이다. 안경이 역사에서 등장하는 것은 약 1300년 즈음이다.
  안경은 유럽에서 탄생하여 이후 중국으로 유입됐다. 우리나라에는 정확히 몇 년 즈음에 안경이 유입됐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학파의 실학사상이 조선의 휩쓸던 1700년대 후반에는 널리 활용되어 글 읽는 선비들의 소중한 벗이었다.
  또한 천리경이라는 망원경 또한 1630년경에 조선에 들어와 널리 활용됐다. 요즘의 고글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풍안경(風眼鏡)은 1800년경에 기병들의 휴대용 장비로 보급되기도 하였다.


<총신이 짧은 단조총은 휴대하기가 간편한 대신 정확도와 사거리가 떨어져 기병이 주로 사용하였다>

  두 번째로는 '단조총'이다. 영화 속에서 단조총은 살인사건에 사용된 것은 물론, 주인공이 말을 타고 살인자를 추격하는 장면에서도 나온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조선시대에는 조총이라는 긴 총만 사용되었다라고 생각하지만, 단조총이라 하여 총신이 짧은 요즘의 권총형식의 화약무기가 조선병사들에게 지급되어 사용되었다.


<조선의 군사무예인 무예24기가 실린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재 그림의 첫 자세>

  특히 말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기병의 경우, 휴대의 간편성을 이유로 단조총을 선호했다. 말 위에서는 총신이 짧은 단조총이 기병의 휴대무기였다. 또한 한 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총구가 셋으로 나뉘어 세 발이 동시에 나가는 삼혈총도 조선후기 기병들의 주요 무기로 사용되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는 삼혈총을 쏘고 적진 깊숙이 신속히 파고 들어가 적의 진을 부순다. 그러나 연속사격의 문제로 조선후기까지 총보다는 활이 기병들에게는 더 효과적이었다.

  세 번째는 시체 검안 시 행하였던 기구들과 상황들이다. 몇 년 전 '다모 폐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조선 여형사 다모>의 경우에서도 시체 검안 시 진행 과정이 어설프게 표현되었으나 '혈의 누'에서는 세밀히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즉, 피살자의 피해 부위를 그림으로 남기고, 어떻게 살해됐는지 살해방법을 과학적 방법에 의해 찾아보고, 더 나아가 직접적 살해원인이 아닌 살해 동기를 찾아 초검, 복검, 삼검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조선시대 때에도 살인사건이 발생할 경우 요즘의 과학수사와 유사한 방법으로 사체를 검안하고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여러 가지 과학적 추론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신주무원록>이라 하여 요즘의 법의학 서적과 같은 책이 검시관들에게 배포됐다. 이를 살인과 관련된 인사 사건의 표본으로 삼아 과학수사의 기틀을 가져갔다.
  영화 '혈의 누'에서도 첫 번째 피살자의 경우, 창이 몸통을 관통해 죽은 듯 보이는데 피살자의 피 굳음 상태와 은수저를 이용한 독극물 시험을 통해 직접적 사망원인이 창이 아닌 독극물에 의한 것임을 판별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신주무원록>에 등장하는 살인사건의 사망 원인을 판별하는 내용 중에는 현대 경찰수사에서도 적극 활용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목을 매어 사망한 자의 얼굴이 검붉은지 여부를 가리는 것은 그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구별하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즉, 자살일 경우는 체중이 실려 목의 동맥과 정맥이 모두 막혀 울혈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연출할 경우는 얼굴색이 검붉다. 목을 조를 경우 목의 겉에 있는 정맥만 막혀 머리 쪽으로 동맥피가 몰리기 때문이다


  2. 아쉬운 몇 개의 옥의 티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어울리는 고증이 있는가 하면 옥의 티도 보인다.

  첫 번째로는 주인공이 군관 신분인데 검 집에 넣은 채 칼을 늘 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경우 환도(還刀)라 하여 칼집에 고리가 달려 이것을 허리춤에 묶어 활동성을 높이는 칼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TV사극을 비롯한 역사물에서 조선후기의 장군들이나 군관들은 늘 검집 채 손으로 들고 다닌다. 심지어는 말을 타고 적을 추격하는 장면에서 조차 손에 칼을 들고 달리는 장면이 연출된다. 요즘 방송되는 <이순신>에서 조차도 장군과 군관들은 칼을 들고 다닌다. 더 이상 조선의 장군이나 군관들을 한 손잡이 검객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TV나 영화의 사극관련 영상물에서는 늘 이렇게 칼을 검집에 넣은채 들고 다닌다. 그러나 조선후기만 하더라도 환도라하여 허리에 칼을 패용하는 방법으로 휴대하였다. 이렇게 들고 다니는 방식은 고려시대의 환두대도의 개념의 칼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역사를 후퇴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무예24기 최형국 관장 조선시대 기병 완전군장 사진>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환도와 기병용 궁시일체인 동개를 패용한 모습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경우 칼을 허리에 차고 활동하였다.
  일본은 검집을 뒤짚어 허리띠에 껴서 패용하지만 조선은 검집을 바르게 한 후 허리부분에 칼 고리를 껴서 패용하였다.

  두 번째로는 늘 그러하듯이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군졸들의 무기가 당파(일종의 삼지창) 일색이라는 것이다. 정말 당혹스럽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TV사극에서도 병졸들은 늘 당파만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왜 그렇게 조선시대 병졸들에게는 당파만을 들고 다니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극 관련 감독이나 연출가들이 제발 조선군인들에게 당파만 쥐어주지 말았으면 한다.


<여기서도 군졸들은 당파만을 들고 적과 대치하려 한다>

  1800년대 초라면 이미 화약병기가 발달하여 병졸들에게는 조총이 개인화기로 보급되었고 죽장창, 기창, 낭선, 편곤, 곤방 등 다양한 살수무기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지창만을 고집한다.
  예전에 TV사극에서 청나라 군대와 접전하는 조선군이 당파만을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전멸하는 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그 장면들이 참 아쉬웠다. 되도록이면 조선군의 위상 좀 끌어올려주는 치밀한 역사고증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시대 정통 군사무예인 무예24기가 실린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당파
세개의 날을 이용하여 상대의 무기를 찍어 눌러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 후기의 경우 보병의 경우라도 조총으로 무장하여 전력을 증강하였다>

 

P.S - 위에 있는 [무예24기 최형국 관장 조선시대 기병 완전군장 사진]은 푸른깨비의 무예24기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muye24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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