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루서블] 중에서 애비게일(위노나 라이더)과 프락터(다니엘 데이 루이스)>

  [매카시즘 , McCarthyism] - 1950~1954년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국무장관 J. F. 댈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다.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으며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후 매카시즘이란 비이성적인 마녀사냥식의 여론몰이 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최근 네티즌이나 일부 기자의 여론몰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 영화가 생각났다.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쓰기 시작하였다.


  중세시대 마녀재판중 최대 규모로 기록되어 있는 세일럼 사건은 1953년에 아서 밀러(Arthur Miller)가 극화한 [시련(The crucible)]의 소재가 되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위노나 라이더의 주연으로 1997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
  세일럼은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일럼은 명칭과는 달리 수십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역사는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고 수시로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1. 세일럼의 개척

  보스턴은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캐이프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중 한 사람인 로저 코낸트(Roger Conant)가 1626년 약 50명의 식민자를 거느리고 이곳 아늑한 항만에 이주하면서 세일럼의 역사는 시작된다.
  세일럼의 원래 명칭은 ‘나움케악(Naumkeag)’. 원주민 인디언 말로 ‘고기 잡는 곳(fishing place)’이라는 뜻이다. 이어 1628년 존 엔디콧(John Endecott)이 이끄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선발대가 도착했다. 엔디콧은 식민지 본진이 정착할 터를 닦으면서 이곳이 평화의 땅이 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명을 세일럼으로 바꿨다.

  1630년 6월12일, 존 윈스롭이 주축이 된 식민지 본진이 당도했으나 인근을 둘러본 윈스롭은 땅이 척박하고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일럼에 정착하길 포기했다. 남쪽 해안을 계속 답사해 내려간 윈스롭 일행은 찰스 강어귀를 주목하다가 그곳 또한 식수가 충분치 못함을 알고서 최종적으로 강 건너 반도 쪽을 정주지로 정하고, 링컨셔에 있는 그들의 고향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이라 명명했다.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면서 항구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세일럼이 뉴잉글랜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635년 세일럼 교회의 목사 로저 윌리엄스에 의해서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됐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했다.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한 절연할 것과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했다. 윌리엄스는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음을 지적하고,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의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의 추방 요구를 수용했다.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의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로드아일랜드의 시작이다.


  2. 갈등의 시작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조지 폭스(George Fox·1624∼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를 요구하고,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했는데,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해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런 반역의 역사적 체험이 철없는 몇몇 소녀의 일탈적 행동을 마녀사냥이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비화시킨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세일럼 마녀사냥의 발원지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세일럼이 아니고 서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댄버스다. 1692년에 댄버스는 ‘세일럼 빌리지’라고 불렸는데, 1637년경에 세일럼 사람들이 더 넓은 땅을 찾아 이주해 세운 곳이다.
  도시 주변에 새로이 형성된 정착지는 자치권을 얻어 독자적인 체제로 발전해가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하지만 세일럼은 오랫동안 세일럼 빌리지에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역으로 번성하던 세일럼과 농업을 주로 하는 세일럼 빌리지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689년 세일럼 빌리지의 요청이 마침내 받아들여져, 숙원이던 독자적 교회를 세우고 교구 목사를 새로 초빙할 수 있게 되면서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으나, 초빙돼온 담임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 빌리지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3. 세일럼 사건의 발단

  17세기 영국의 잉글랜드나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은 마녀사상으로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종교적 인 이유로 마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악마와 계약해 하느님을 배반하고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 이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불가사의하고 기분 나쁜 요소들을 서로 전가하는 과정이었다.

  세일럼의 마녀재판은 미국 문명사에서 하나의 치욕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 남아 가릴 수가 없다.
  당시의 마녀재판은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럼의 마녀들」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밀러는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재판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관련된 여자들의 수와 나이만 조금 변경했을 뿐 이름까지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다.

  1692년 1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 세일럼(Salem). 개척 초기의 고단한 시기라 더욱 그랬겠지만, 엄격한 청교도의 규율이 적용되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리고 또한 주민들간의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한창이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둔 농부 존 프락터(John Proctor)는, 아직 어린 소녀이며 그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에비게일 윌리엄스(Abigail Williams)와 혼외정사를 벌이고 이것이 아내에게 발각이 되자, 뒤늦게 참회하여 애비게일을 집에서 내보내고 다시 가정과 일에 충실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에 질투를 느낀 애비게일은 동네 소녀들을 모아 밤중에 몰래 숲속에 들어가, 하녀인 티튜바(Tituba)의 주관으로 닭을 죽이고 춤을 추면서 그 피를 몸에 뿌리며 자신들의 소원을 말하는 비밀스런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물론 애비게일의 소원은 엘리자베스를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목사인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가 목격하게 되고, 소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된다.


  4. 세일럼 사건의 전개

  마녀사냥은 여러가지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세일럼 빌리지의 담임목사 패리스의 집에서 시작됐다.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질렀다.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했다.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하게 했다. 의사는 그 처방을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원인에 의한 발병이라고 물러선다. 초자연적 원인이란 마법을 말한다.

  사람들을 불러 여러가지 질문을 통해 확인을 해보니 베티는 전날 애비게일과 숲 속에서 춤을 추다 쓰러졌다고 한다. 베티가 지붕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을 봤다는 허황한 진술이 뒤따랐다. 마술을 행했거나 목격한 것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서서히 빠져나올 수 없는 일정한 상황으로 몰려 들어간다. 그 강요된 상황에서 마구 튀어나온 이름의 여자들은 마녀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사태는 급진전한다.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했다.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바베이도스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했다.

  고발된 마녀들은 자백을 강요당한다. 악마와의 사악한 계약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호손 판사 앞으로 끌려간다.
  마녀재판은 보통의 재판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마술은 겉으로 보기에는 물론 본질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술에 대한 바위 같은 증거는 마녀와 피해자의 존재이다. 마녀로 지목되었을 때 그에 대한 변명은 법정을 모독하는 것일 뿐이므로 변호사도 할 일이 없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세일럼으로부터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됐다.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했다. 패리스 목사에게 닥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됐다.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갔다.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다.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였다.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됐다.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됐고,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프록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됐다.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 빌리지를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5. 새로운 국면으로의 진행

  소녀들의 기이한 행각을 두고 마을에는 사악한 힘이 퍼져 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고, 패리스 목사는 이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전문가인 해일(Hale)목사를 초청한다.
  해일 목사는 애비게일을 비롯한 소녀들을 불러 모아 추궁을 하게 되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애비게일은 자신이 마법에 씌웠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그 증거로 마을 사람들 몇명을 마녀로 지목한다. 실날같은 희망을 발견한 소녀들은 여기에 동참하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의 정체란 계속해서 사산을 했다는 이유같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시작이었다.

  점차 마을이 광란의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에 의심을 품은 프락터는, 그의 집에서 하녀로 머물던 메어리 워렌(Mary Warren)을 추궁하여 그날밤 있었던 밀교스러운 의식의 전말을 알게 된다.
  프락터는 애비게일을 찾아가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지만, 애비게일은 프락터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여전히 열렬한 구애의 언사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화가난 프락터는 그 자리를 떠나고 자신이 직접 진실을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가 들지만, 간통을 한 사실이 드러날까봐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마녀재판을 다른 목적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다.

  드디어 재판정에서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교수형이 언도되기 시작하고,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불거진 서로에 대한 악감정들이 얽히면서 점차 난장판이 되어 간다.
  이러던 와중 애비게일은 자신이 만든 인형을 매어리 워렌에게 전달하여 재판정 증언대에 서도록 한다. 메어리 워렌은 그 인형이 엘리자베스가 선물한 것이라며 재판관들에게 제출하는데, 그 안에서 바늘이 발견된다. 확고한 물증(?)으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마녀로 지목이 되어 구속된다. 평소 성품이 좋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던 레베카 너스(Rebecca Nurse)도 함께 구속이 된다.

  프락터는 메어리 워렌을 추궁하여, 그것이 조작된 것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증언한다는 약속을 받아 함께 법정에 출두한다. 프락터는 엘리자베스와 레베카의 무죄를 주장하는 주민들의 연서를 법정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미 상식을 잃어버린 법정이 그의 항변을 온전히 받아줄리는 없었다. 평소 감정이 좋지않던 패리스 목사는 프락터가 안식일에도 일을 한다며 그의 신심을 추궁하게 되고, 법정의 충실한 배심원(?)인 소녀들은 메어리 워렌에게 악마가 깃들었다며 간단하게 제압해버렸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느낀것은 프락터가 아니라 메어리 워렌이었다. 갑자기 실신할 듯한 행동을 취하며 프락터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발광을 한 것이다. 여기에 다른 소녀들이 동참하게 되니, 프락터마저 마녀로 지목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락터는 이 모든 일이 애비게일의 흉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자, 자신의 간통죄를 자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남편의 자백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증인으로 나온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간통사실에 대해 부정하게 되고, 이로 인해 프락터는 재판관으로부터 악마의 사도로 낙인찍히게 된다.
  더이상 어찌할 수 없이 사태가 커지자, 애비게일은 패리스 목사의 돈을 훔쳐 도주하게 되고, 마을 전체에서는 이 모든 소동에 대한 회의감이 크게 인다.


  6. 사건의 마무리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시작된 것은 6월 초순이다. 당시 뉴잉글랜드에는 총독의 부재 탓에 합법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행부가 없었다. 뉴잉글랜드 지도층은 1688년 명예혁명과 더불어 제임스 2세가 임명한 에드먼드 앤드로스 총독을 몰아낸 후 일종의 공안위원회를 구성해 식민지 행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본국의 정권이 안정된 1692년 5월 중순, 윌리엄과 메리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하고 심리에 착수하도록 했다.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이었다.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이틀 뒤인 6월10일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고,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됐다.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하고 말았다.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재판관 중의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면서 재판관직을 사임했다.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의 경우는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사탄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됐다.

  자신에게 오류가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해일 목사는 재판관을 설득하여 구속된 이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한다. 댄포스 재판관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통치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하기에는 그다지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구속된 이들이 마법에 걸렸었다는 죄를 인정한다면 처벌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일종의 사상전향서, 또는 준법서약서), 해일 목사로 하여금 그들을 설득하게 한다. 그러나 프락터를 비롯한 일행은 자신의 양심을 거짓증언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사형당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했다.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돼 재판이 속개됐으나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났다. 5월에 이르러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되고,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했다.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했다.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했다.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과 댄버스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세일럼 제1교회 또한 1992년 9월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시켰다.
  당시 마녀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140명이고, 마법의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된 사람은 44명이었다.


  7. 왜 세일럼 사건이 이렇게 커졌는가?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뉴잉글랜드 사회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윈스롭의 일기에 따르면 이미 1647년에 마녀재판이 열린 적이 있고, 그 이듬해에는 마가렛 존즈라는 여자가 마녀로 처형됐다. 1662년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집단적인 마녀소동이 일어나 13명이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5명 중 4명이 혐의가 인정돼 처형됐다.
  한 통계에 따르면 1647년에서 1663년까지 뉴잉글랜드에서 모두 79명이 마녀 혐의로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33명 중 15명이 처형됐다. 17세기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마녀재판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영국 쪽으로 돌리면 희생자는 더욱 엄청나다. 청교도 혁명 전야인 1645년에서 1647년 사이의 찰스 2세 치하에서 수백명이 마녀라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사실 마녀재판은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종파적 갈등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500년부터 종교적 관용이 정착되기 시작한 1660년까지 유럽에서 대략 5만~8만명이 마녀재판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와 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을 펼쳤다.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이름 높았다.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1812년 영국과 벌인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인근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호손이 [주홍글씨]의 첫 장인 '세관'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인근 지역에서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이따금씩 드나드는 한산한 항구로 몰락해버렸다.
  1938년, 한때 뉴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이던 세일럼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세관 건물을 중심으로 세일럼 항구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고, 그 결과 예전의 영화를 말해주는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경제적 갈등이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다. 그러기에 아서 밀러는 이를 소재로 한 연극 [시련]에서 존 프록터로 하여금 "복수가 곧 법이 되었다"고 부르짖게 했다.

 

  여담으로,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가 [옛 이야기]를 비롯한 초기의 단편들과 [주홍글씨]를 쓴 곳이 이곳 세일럼이요, 유명한 [일곱 박공의 집]의 무대 또한 세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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