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인물형 토기>

  1. 문명인들의 오만과 편견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종족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과 환경 같은 후천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 선천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소아병적인 유치한 발상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위대한 문명을 파괴하려다 결국에는 그 위대한 문명인들에게 격파되고 축출당하거나 문명에 동화되어버리는 잔인한 야만인들의 이미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심지어는 그 같은 상황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야만적인 고대 스키타이 인에 대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문명인들이, 미개한 훈과 몽골 인에 대해서 개화된 중국인이나 유럽 인들이, 야만에 대한 문명의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이란 어떻게 발달되었는가? 분명히 그 바탕에는 경제적인 면에서의 성취가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 생존과 직면한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미학적인 창작욕구를 추구할 수 있다.
  역사를 보면 인류는 미학보다는 훨씬 잔인한 다른 작업에 더욱 흥미를 가져왔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근세의 예를 들어보아도 명확해진다. 산업혁명을 먼저 이룩한 유럽 각국은 그들보다 훨씬 긴 세월 동안 문명을 이룩해온 이집트, 중동, 인도, 중국,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함한 모든 세계 각국의 야만인들을 공격해서 이들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러한 시대가 물리적으로는 지나갔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도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으로부터 2백~3백 년 전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2천~3천 년 전의 인간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대의 농업혁명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청동기 시대에 비옥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축복받은 자연환경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농업혁명이 가져다준 결실은 근세의 산업혁명이 이룩한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농업혁명이 완수되어 부를 축적하고, 역사가들이 고대 국가라고 부르는 사회 동원체제를 먼저 만들었던 인간들은 농업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주변 사람들에 대해 먼저 잔인한 정복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실제로 얼마 남지 않은 역사 기록과 유물들로부터 추론해보면, 유목민들은 농업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지 않았다. 꾸준히 농경과 도시건설을 시도했으나 자연적인 여건과 다른 종족과의 충돌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최초로 역사에 기록되어 전하는 야만의 스카타이인들 중에는 농업에 전념한 계층이 분명히 존재했고, 대규모의 도시 역시 건설되었다. 훈의 유적에서 직접 만들어진 와당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써 이들 역시 농업혁명과 도시화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보다 안전하고 안락한 정주생활에 대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광대한 유라시아의 대평원과 변덕스러운 날씨는 유목민들에게 이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신의 의지'였다.

  세계지도에서 동으로는 한반도 이북의 만주지방에서 서로는 유럽의 한가운데인 헝가리 평원까지, 북으로는 남부 시베리아에서 남으로는 티베트 고원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유라시아 대평원이다. 이곳은 문명의 발상지와는 거리가 멀어 농업혁명의 혜택을 늦게 받았거나 아예 받지 못한 지역이다. 농업혁명이 완수되어 사회동원체제가 만들어지고, 전쟁을 위한 충분한 부가 축적된 문명인들은 보다 안락한 생활을 위해 농지와 노동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유라시아 대평원에 사는 사람들을 먼저 공격할 개연성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역사는 대부분 문명인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와는 정반대로 기록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일방적일 수 없다.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문명권이 확대되어가면서 발생했을 제반 문제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작용으로, 이 초원에 사는 사람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경제력이나 인구 등, 당시 종족간의 투쟁 결과를 결정했을 기본 요소 중 유라시아 초원에 살던 사람들에게 유리한 점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역사상 문명 대 야만의 투쟁 결과는 양측의 잠재력과는 무관하게 정반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의아한 결과를 야기한 중심에는 유라시아 초원에 살던 사람들의 강인한 의지와 생명력이 있었으며, 동시에 그들과 함께 태어나 자란 말들, 그리고 주력 무기였던 활이 있었다.
  초원에서 활을 사용한 사람들의 큰 범주에는 스키타이, 훈(흉노), 투르크(돌궐), 위구르, 몽골, 거란, 여진 등이 속하며, 더 구분하자면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종족이 여기에 포함된다. 한민족의 선조인 예맥인 역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들의 역사서를 후세에 전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들에 대한 사실은 그들을 기록한 당대의 적들과 그 후손에 의해 지속적으로 왜곡되어왔다. 그들 중 역사적으로 큰 흔적을 남긴 종족은 대략 아래와 같다. 물론 역사에 남겨진 그들의 흔적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2. 스키타이

  본격적인 문명과 야만의 충돌사(이 구분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달리 표현할 적절한 용어가 없다) 중에서 연대기상 가장 이른 시기로 기록되어 있는 사건은 스키타이와 페르시아의 충돌이다. 그리스인들에 의해 스키트(Scyth), 페르시아와 인도인들에 의해 사카(Saka)라고 불렸던 이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들은 현재 동부 유럽에서 남부 러시아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살고 있었으며, 역사도 수천 년에 이른다.  유럽 학자들은 그리스 도자기에 새겨진 그들의 모습에서 이란인 계통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나, 광범위하게 이동하면서 유목해야 하는 초원에서의 생활방식이나 개방적인 초원인들의 사고방식을 감안할 때 스키타이를 한 종족으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키타이인 모두가 유목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 계의 스키타이인도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산업 역시 그 구성만큼이나 복잡해서 농업, 상업, 유목, 심지어는 항해를 통한 교역까지 포함되며, 교역을 위한 항구도시도 건설했다. 농업 역시 생산해서 스스로 소비하는 형태가 아닌 대규모의 기업 농업이 존재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들은 강력한 '왕족 스키타이'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기원전 9세기 경에 이미 상당히 잘 정뵈된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현재의 러시아 남부와 흑해 일대,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생활했다.

  대략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이들은 그들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 지역에서 소아시아로 진출하며 고대 서아시아의 제국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접촉은 그리 폭력적이지 않았으나, 점차 그들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국제분쟁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8세기 경부터 백년 이상 그들은 아시리아와는 시종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시리아의 경쟁국이었던 메디아 왕국을 공격해 기원전 628년에는 일시 정복하기도 했다. 페르시아가 아시리아와 메디아를 잇달아 정복하고 서아시아의 패자로 들어섰을 때, 이 지역에서는 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과 정주민인 페르시아인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정복왕 다리우스는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페르시아 내에서 종교인들이 주축이 된 내란을 진압하고 일인독재체제의 강력한 통치권을 확보한 그는 BC 514년, 70만의 병력을 동원해 스키타이 영토를 침공했다. 작전은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다리우스는 육군을 북진시키는 동시에 흑해에 대규모의 함대를 띄워 이들에 대한 보급선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지리적인 숱한 제약 때문에 군대의 행군로가 지속적으로 해안선에 가깝게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리우스의 육군은 해군과 서로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졌다 하면서 스키타이 군을 계속 궁지에 몰아넣었다. 최소한 다리우스는 그렇게 생각했고, 페르시아 군은 연전연승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문제는 승리가 그들이 거둔 것이 아니라, 스키타이 인들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데 있다.

  치고 빠지는 전술로 일관한 스키타이 인들은 연승에 취해서 계속 그들을 쫓아 내륙으로 들어오는 다리우스 군에게 밀린 듯 후퇴하며 청야작전을 전개하고, 주민, 식량, 숙소 등 모든 것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자 길어지는 보급선이 점차 다리우스 군을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유목민들이 단체사냥을 할 때 짐승 떼를 함정으로 유인하거나 몰아넣는 것과 비슷한 전법이었다. 스키타이 인들은 바람같이 나타나, 보급이 끊어진 페르시아 군을 향해 일순간 화살을 퍼부어 타격을 가하고, 페르시아 군이 정신을 수습할 때면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위기에 빠진 쪽은 스키타이가 아니라 페르시아 군이었다.
  이 원정에서 페르시아 군이 궤멸을 면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다리우스가 궤멸 전에 철군을 결정했다는 것 뿐이었다. 이 원정 이후로 양측은 대결보다는 공존의 길을 택했다. 스키타이는 유럽과 서아시아 전역에 매우 두려운 강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보낸 북부 원정군까지 격퇴시켜 그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스키타이는 BC4세기 경 우랄 산맥에서 남하한 사르마트 인에 의해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가, BC3세기 후반에는 러시아 남부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빼앗기고 영향력은 크림 반도로 국한된다.
  이들의 유품들을 보면, 문화적으로 공존하거나 투쟁했던 아시리아나 메디아, 페르시아 뿐 아니라, 헬레니즘 그리스와도 밀접하게 교류하며 서로가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키타이 인들의 청동기, 철기가 끼친 역사적인 영향력은 매우 광범위해서, 동아시아 깊숙이까지 그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스키타이 인들은 자신에 대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3. 훈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역사가들에게 훈 족만큼 악명을 얻은 종족도 없을 것이다. 훈은 중국의 역사에서는 아주 먼 고대로부터 '흉노'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매우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도 훈은 기원후 3세기 경부터 로마 중심의 유럽을 무너뜨리고 게르만 민족들을 대이동시킨 잔인무도한 야만족으로 그려진다.
  중국의 기준에 따르자면, 그들의 중화세계를 괴롭히던 사방의 야만인 이적융만 가운데서 훈은 북적에 속한다. 과거의 역사가들은 기원전에 중국 북부 몽골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과, 헝가리 유역까지 진출한 사람들이 같은 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비교적 최근 들어 이들의 유물의 발견되면서 그 연관성이 밝혀졌다.

  훈 족은 중국의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아시아에서 역사시대 이전인 수천 년 전의 신화시대에도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했었다고 하지만, 동북 아시아 전체를 석권했던 이들이 진정한 훈 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기원전 1세기 전후에 흉노의 세력이 워낙 강성했기 때문에, 수천 년 전에 동북방에 있던 알타이 어를 사용하던 몽골 계통 사람들 전체의 활동과 겹쳐졌으리라고 추측한다.
  중국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인 훈 족들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몽골 고원과 북부 중국을 무대로 강력한 국가를 형성한다. 하지만 격변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부는 중국사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신세계를 찾아 서쪽의 초원지대로 향했다. 이들은 4세기 경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진출해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야기시킴으로써 결국 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다고 한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훈이 유럽에 나타났을 때, 당시 유럽 인들은 '작은 키, 큰 머리, 낮은 코, 작고 깊은 눈...' 등의 신체적 특징으로 훈을 묘사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럽 인들이 바라보는 몽골 계통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근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학자들은 훈을 투르크 계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동로마의 황제가 훈의 지도자들에게 '투르크의 왕자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세에는 특정한 민족의 이름으로 굳어졌지만, 고대 알타이 어에서 '투르크'는 단지 '강한 사람들'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투르크 인이 하나의 종족으로 일체감을 갖기 시작하는 시기는 훈의 유럽 진출보다 약 200~300년 뒤의 일이며, 그 장소도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다. 유럽에 진출한 훈 족들이 그들을 '훈'이라고 자칭했다.
  유럽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투르크-몽골이라는 종족으로 훈을 분류했는데,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현대의 터키인과 한국인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터키 인의 체격은 유럽인, 특히 고대 로마인에 비해 결코 작은 편이 아니며, 코 역시 유럽인들만큼이나 높고 눈도 결코 그들보다 작다고 할 수 없다.

 
<훈 족의 왕 아틸라>

  사실 훈이 몽골인이었나 아니면 투르크인이었나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유목민들의 개방성을 감안할 때 분명히 여러 종족들이 섞여서 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몰려갔을 것이고, 유럽에 도착할 때쯤이면 벌써 유럽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을 것이다. 실제로 훈의 왕 아틸라(Attila)의 초상으로 남겨진 부조물을 보면 그는 몽골인이나 투르크인보다는 유럽인에 가깝다.

  여담으로 훈과 동이에 속하는 예맥인의 관계는 깊게 얽혀 있다. 예를 들어, BC3세기 경 훈의 지도자인 칸을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 2인이 보좌하고 있는데, 백제 역시 5세기까지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칸'의 칭호 역시 신라의 마립간(麻立干), 부여의 고두막한(高豆幕汗) 등에서 유추할 수 있어, 예맥인들도 공통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단군 이전 시대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치우'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화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일부 역사가들이 단군 조선 이전에 존재했다고 가설을 세운 '한웅국'의 14대 한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치우와 관련해서 공손헌원과의 대전쟁을 동이전이 아닌 흉노전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에서 발견된 신라 토기 '기마인상'과 현재까지 발굴된 훈의 유물 중에서 안장, 등자, 그리고 말 뒤에 올려놓은 솥 등 일치되는 부분들이 확인되었다. 4세기 경 유럽인에 의해 그려진 훈의 기병을 보면, 그가 쏘려고 하는 활은 <수렵도> 등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활 '예맥각궁'과 그 모습이 일치한다.

  더욱이 고대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사실은, 훈과 예맥인 간의 교전 기록을 어느 사서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을 감안할 때 매우 부자연스럽고 이례적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훈과 예맥의 관계는 앞으로 우리 고대사에서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4. 투르크

  유라시아 초원에서 투르크인들은 몽골 계통에 비해 비교적 뒤늦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이 훈, 유연, 선비 등의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투르크인들의 발전속도는 무척 빨라, 그로부터 불과 수백년만에 소아시아 방향으로 진출한다. 이슬람 권에 편입되고 난 이후에는 이슬람을 대표해 유럽인들과 치열한 투쟁을 주도하며 세계사의 강대한 세력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투르크인들은 한자로는 돌궐(突厥)이라 표기되며, 서융에 속한다.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이들은 수와 당 등 선비 계열의 중국 왕조에 대해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지만, 고구려와 그 왕국에 속했던 키타이(거란)인, 그리고 그 왕국의 후예들인 발해와는 적대적이었다.

  자신들의 신화에 의하면 투르크인들은 늑대의 후손이며,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6세기 중반에 이들을 통합해 초원의 지배자로 만든 지도자는 토문 카간(土門可汗)이었다. 카간은 몽골 계통 유목민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부르는 호칭인 '칸'을 계승한 것이다.
  토문의 사후 투르크는 동서로 분열된다. 동투르크는 서투르크에 대해 종주권을 가지면서 현재의 몽골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고, 서투르크는 사산 조 페르시아와 국경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동서로 분열된 투르크인들은 곧 서로를 적대시하게 된다. 여기에 중국 왕조들이 이것을 최대한 이용함으로써 갈등을 확대시켜 결국 당 태종 무렵에는 동,서투르크 모두 당 왕조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당의 혼란기였던 측천무후 시절, 투르크는 카파칸 카간에 의해 다시 한 번 통합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그는 측천무후의 청을 받아들여 요서의 키타이인들을 공격, 학살한 후 신생국 발해까지 공격하지만, 발해의 건국왕 대조영에게 패배해서 타격을 입는다. 그 뒤 이어지는 내부 혼란으로 시달리다 8세기 초에 그의 통치는 와해되었다. 카파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초원의 주인은 투르크인으로부터 그들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는 위구르인에게로 넘어간다. 그로부터 1세기 후 키타이인들이 몽골 초원의 주인으로 군림하자, 투르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서쪽에 남아 있던 일부 투르크인들 역시 쵤투르크(처월 돌궐, 또는 사타 투르크)라 불리며, 이극용(李克用)의 지휘 아래 혼란에 빠진 중국 왕조의 충성스러운 보호자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당 왕조의 몰락과 함께 이들도 몰락하고, 이극용의 아들은 5대10국 중 하나인 후당을 세우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투르크인들은 10세기 초반에 그들의 출발지인 몽골 초원과 북부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반면, 중앙 아시아와 중동지역의 이슬람 세계 내에서 화려하게 패권을 차지하는 데는 성공한다. 이슬람화 된 투르크인들은 초기에 사산 조 페르시아 등 아랍 여러 국가에서 노예병 등의 신분으로 종군하다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투력을 바탕으로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나간다. 11세기 경 셀주크 조 시절에는 순니파 세계에서 아랍 계열의 칼리프를 무력화하고 술탄의 명칭을 계승함으로써, 스스로 세속적으로는 이슬람권의 맹주로 자리잡게 된다.
  투르크는 오스만 조에서 그 전성기를 맞이해 동로마인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149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1천 년 이상 유지되어 온 이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지중해와 세 개의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다. 현재 터키 공화국의 모태가 되었다.


  5. 몽골

  중국인들에 의해 서하(西夏)로 불리던 위구르 왕국이 9세기 중엽 몰락한 이후 몽골 대평원에는 강력한 지도자도 나타나지 않아,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몽골인이 아니라 메르키트, 케레이트, 나이만, 타타르, 자지라트, 타이치우트, 콩기라트, 오이라트 등 수백 개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이 하나의 정치적 통일 조직을 이루게 된 계기는 테무진이 1206년 '대 몽골 국(에게 몽골 울루스Yeke Mogol Ulus)'의 성립을 선포하고 '칭기즈 칸'으로 즉위한 사건이다. 그전까지는 '몽골인'이라는 민족도, '몽골'이라는 단어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때에 모인 각 종족에는 몽골인 뿐 아니라 투르크인의 여러 종족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이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가면서 '몽골'의 개념 역시 확대되어, 점차 키타이인과 위구르인까지 몽골인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몽골은 원래 하나의 민족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종족들과 싸워나가면서 일체성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몽골인에 대한 이미지는 역사에서 극히 상반된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몽골군은 중앙 아시아와 중동지역, 유럽, 그리고 중국을 차례로 휩쓸며 잔인한 살육과 파괴 행위를 자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몽골의 기마 궁수대와 대적하던 호라즘 샤 왕국의 페르시아 군과 투르크 군, 동유럽과 중부 유럽의 기사단, 중국 송 왕조의 농민들로 구성된 보병군은 여지없이 패배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기록이 패배한 측에 의해서 기록되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이 과장되기는 했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복 전쟁시 수반되는 학살과 파괴 행위는 역사적으로 야만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몽골이 전 세계로 확장시켜나가던 초기에 주로 중앙 아시아와 중동지역에서 발생했던 잔인무도한 행위는 상대 적군에게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심리전의 성격이 강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시범 케이스는 먼저 몽골인들에 의해 일차로 과장되고, 이 소문을 듣고 전달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엄청나게 부풀려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지역을 정복한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는 자신이 바그다드를 공격하여(1258년) 80만 명 이상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바그다드의 인구는 80만 명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칼리프 조를 정복한 이후에도 바그다드 주민들은 여전히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도시 파괴 행위에 대한 설명으로는 심리전의 측면과 함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공포감이 그들이 도시에 대해 무지했던 만큼이나 컸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경무장의 기마 궁수단에게 성을 공격해야 하는 공성전만큼 어려운 전투는 없다.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어렵게 성을 점령하고 나면, 성의 방어군이나 주민들은 일단 숨어버렸다. 그리고는 몽골 군이 떠나고 난 후에야 돌아와 허물어진 성벽을 성벽을 보수하고 다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결과적으로 몽골 군은 후방에 적을 남겨놓은 채 진격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몽골 군은 활동 초기에 같은 도시를 여러 번 점령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자면 아예 그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몽골의 주요 지휘관들은 도시를 공격하면서 그 도시의 효용성이나 필요성, 정주민들의 생활방식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칭기즈 칸에게 점령한 대도시들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말을 키울 수 있는 초원으로 바꾸자고 건의했을 정도다. 다행히도 칭기즈 칸은 그를 보좌하고 있던 키타이인이나 위구르인의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에 그 같은 멍청한 의견은 기각되었다. 몽골인들이 영역을 확대해 나가면서 공성전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고, 공성전 전문가들을 군대에 합류시키면서 도시 파괴와 무분별한 학살은 현저하게 감소한다.
  역사적인 사료들을 보면, 몽골은 점령 후 그 지역에 행정책임자로써 주로 위구르인들을 남겨놓았다. 유럽이나 페르시아의 기록대로 모든 생명이 학살되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면, 몽골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을 다스릴 책임자를 임명한 셈이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몽골 군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싸우지 않는' 군대였다. 그보다는 몽골 자체가 고정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라, 영토가 확장되어 나가면서 끊임없이 개념 자체도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정복된 자들 중 상당부분이 몽골에 포함되었다.
  이상으로 볼 때, 초기 몽골 군 지휘관들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야만적인 학살과 파괴 이미지와는 반대로, 몽골인들은 대체적으로 여러 종교에 대해 관대했다. 점령지에서 상업과 다른 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한 시도도 꾸준히 실행되었다. 현재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춰진 것은 쿠빌라이 칸 때이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현대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대공황에 빠진 미국 경제를 구하기 위해 추진되었던 뉴딜 정책보다 약 500년 앞서,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동반한 농지 개발사업이 현재의 중국 서부와 남부, 그리고 베트남 북부지방에서 추진되었으며, 여러 개의 대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가장 신경 쓴 분야는 건설이 아니라 무역이었다. 그들은 광대한 몽골 제국 내의 모든 관세를 철폐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유무역을 현실화시켰다.
  은을 중심으로 하는 화폐제도 역시 그들에 의해 최초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몽골의 법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매우 엄했고, 공정하게 집행되었다. 이러한 법치주의 덕분에 "황금 쟁반에 보석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아무 탈 없이 여행할 수 있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몽골인들로부터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 자유무역, 낮은 세율, 정부 주도의 국책사업 등 현대적 의미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상을 찾을 수 있다.
  다행히도 몽골인들은 그들이 기록한 자신들의 역사인 <몽골 족 비사(Secret History of Mongols)>와 <집사(輯史)>, 그리고 수많은 자료를 후세에 남겼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몽골 제국의 정사로 사용하는 <원사(元史)>는 원을 무너뜨린 명 왕조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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