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잉글리쉬 롱보우의 소개

 

  영국 유(Yew) 장궁. 재료가 되는 주목(Yew)이기 때문에 유 장궁이라고 불리우는데 이것이 잉글리쉬 롱보우다. 상당히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사거리가 긴 것은 재료인 주목의 특징 때문이다. 즉, 활의 제작기법 때문에 사거리가 긴 한국의 각궁과는 다르게 그저 재료에 의존한 단순한 직궁이다.
  활의 당기는힘은 32인치에서 105ibf (1ibf는 약1파운드를 들어올리는 힙을 뜻한다)

  장궁이란 크기가 대략 1.5~1.8m이상 되는 활을 가리킨다. 대부분 주목으로 만들어졌고 당기는 힘은 사냥용은 222~266N(대략 20~26kg을 1미터 들어올리는 힘) 정도 된다. 현대 장궁은 265N, Mery Rose(메리 로즈라는 1500년대쯤의 침몰선에서 건진 활)는 약706~804N이다.
  사정거리는 165~228m(180~249야드), 현대 장궁은 180m정도이며 667N의 메리로즈 복사품은 53.6g 화살을 328.0m, 95.9g 화살을  249.9m까지 쏜다고 한다. (위키 대백과사전 참고)
  화살의 길이는 주로 3피트(90cm) 전후이다.

  웨일즈나 영국의 궁병은 분당 최소한 10발의 '조준된' 화살을 쏘고, 숙련된 궁병은 분당 15발을 발사한다. 일반적인 롱보우 궁병은 60~72발의 화살을 지급 받았다고 하니 최대속도로 연속으로 쏜다면 3~6분에 다 쏴버리는 양이다. 활의 특성상 석궁이나 초기 화기보다 정확하고 멀리쏘고 연사가 매우 빨랐다. 다만 활은 석궁에 비해서 쏘기위해 많은 훈련이 필요하고 쏘는데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화기가 발달될수록 뒤쳐지게 되었다.
  궁병의 훈련도를 높이기 위해 영국내에서 활쏘기 의외의 모든 스포츠를 금지시킨 왕도 있었다. 장궁병들은 뼈가 기형이 될정도인 경우도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영국의 장궁은 주목으로 만들었는데 이 나무는 영국에 자라지 않는다. 주목을 들여오는 곳은 프랑스. 100년전쟁에서 적국인 프랑스가 주목을 생산하고, 그 주목으로 프랑스군을 죽이고 다녔으니 쓴웃음이 나오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각궁 역시 재료는 동남아에서 들여오는 물소의 뿔이다. 한우의 뿔로는 그 강도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강력한 활이지만 재료를 외국에서 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잉글리쉬 롱보우는 제조가 간단하고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관리가 쉽지만 낡아지면 보수도 안되고 거의 쓸모가 없어진다. 우리나라의 각궁은 공정기법의 섬세함으로 인해 거의 낡지 않으며 보수는 그저 줄만 갈아주면 된다. 대신 생산이 어렵다.

  이것이 잉글리쉬 롱보우에 쓰인 보드킨 화살이다. 일반적인 화살보다 더 길쭉하고 촉이 무거우며 전반부의 나무 부분도 주로 더 무거운것을 썻다고 한다. 끝부분이 창끝처럼 되어 있어서 일반 화살에 비해서 상처는 덜하고 작다. 방어구에 가하는 관통력이나 사거리 증강용으로 생겨난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상대하는 유럽의 군대는 대부분 갑주를 걸치고 다녔으니 그랬을 것이다.


  2. 잉글리쉬 롱보우로 싸우는 방법

  메리로즈 기준으로 봐서 활을 당기는 힘은 600N 이상. 사정거리는 250~ 320M이며 장궁병은 근접전을 대비해 숏소드나 해머로 무장했다고 한다. 보통 궁병을 지키기 위해서 전장에 물리적인 장애물을 설치했다.
  전투에서의 진형은 중앙에 보병들과 소수의 궁병, 그리고 지형의 이점을 살려서 측면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측면에 장궁병들을 배치하여 비스듬하게 박아넣은 목책으로 기병의 돌격을 저지한다.

  가끔은 영국 부대의 60~80%나 장궁으로 무장할 정도로 궁병의 의존도가 높았었다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전장에서는 더 빨리 쏘기위해 화살통에서 꺼내쓰는게 아닌 자신의 앞의 땅에 박아두고 썻다.
  조금 거리가 먼 곳에는 조준사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한 지점을 조준해서 발사했다. 영국은 이 화살의 폭풍으로 유명했다. 한 명당 분당 10발 이상, 첫발이 도달하기전까지 공중에 약 2~3발을 동시에 띄우는 정도이니 맞는 입장에선 엄청나게 쏟아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보드킨 화살을 써서(일반화살보다 배로 무겁다) 근거리(약 50~70m. 기병이 3~5초 달릴거리)에서는 어느정도 갑옷을 관통할 확률이 있었다고 하지만 고급 플레이트 메일이면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한발당 최소 600N의 위력으로(60kg 사람이 1미터 위에서 누워있는 자신에게 떨어져온다고 생각해보라) 여러 발을 맞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온몸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최상의 상태의 플레이트 메일 세트를(매우 비싸다) 몸 전체와 말에 다 갖춘 기사는 매우 드물었으므로 문제가 별로 안되었을 것이다. 보통은 중요한 부분만 가리거나, 관리와 제조상으로 철의 질이 나쁜 부분이 있거나, 말은 상대적으로 갑옷이 약하거나, 갑옷의 조인트 부분들의 약점이 있었으므로 잡을수 있었다.


  3. 크레시(crécy) 전투


<푸른색이 영국군. 영국군의 언덕 위 V자형 배치가 눈에 띈다>

  지금 소개하는 크레시 전투로 인해 기사도는 옛이야기로 멀어지게 된다. 많은 국가가 기사단의 전술적인 효용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크레시앙 퐁티외 전투이다. 그 계기를 제공하는 주역은 당시 기사도의 귀감이라고 여겼던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였던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유명한 전투인만큼 수많은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료를 많이 찾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전투의 생생한 재현이 가능해졌다.

  전투가 벌어진 것은 1346년 8월 26일 토요일이었다. 필리프6세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대군이 북진 중인 것을 안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 미리 크레시의 앞쪽 구릉지대 정상부근에 넓게 주둔하고 있었다.

  잉글랜드군의 총병력은 약 12,000명. 그 중 잉글리쉬 롱보우로 무장한 궁수들이 약 7천명이며, 이들에게 지급된 화살의 수는 1인당 48발이었다. 전투 중 화살이 떨어지면 뒤쪽으로 나와 보급받도록 충분한 양의 예비화살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머지 5천명은 대부분 창병이었으며 기사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중앙군과 좌익, 우익의 셋으로 부대를 나누었다. 지휘관인 에드워드3세는 후방의 높은 언덕에 호위병을 데리고 전장을 내려보았다. 중앙군은 흑태자 에드워드가 직접 지휘.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좌우익은 노샘프턴 백작과 애런들 백작이 각각 지휘했다.
  잉글랜드의 좌익 끝에서 우익 끝까지의 거리는 거의 2km에 달해, 전반적으로 병력에 비해 폭이 넓고 깊이가 엷은 형태였다. 이들이 '초원 위에 누워 있다가 프랑스군이 도착하자 일어났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미 잉글랜드군은 며칠전부터 휴식을 취하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병력은 잉글랜드군의 3배에 달했다. 필리프6세는 자국 뿐 아니라 다른 동맹국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아 총 36,000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주력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유럽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또한 잉글리쉬 롱보우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에서 가장 최신 무기인 제노바 복합석궁으로 무장한 용병 15,000명을 동원하였다. 제노바 복합석궁은 가운데에 힘 받는 부분을 짐승의 뿔로 보강하고, 거기에 나무와 다른 재료들을 접합시켜 만든 것이다. 석궁으로부터 발사되는 화살인 '볼트'의 위력은 오히려 잉글리쉬 롱보우에서 발사되는 화살을 능가했다. 다만 연발사격속도는 잉글리쉬 롱보우가 분당 12발, 제노바 복합석궁은 3발이다.
  제노바 복합석궁의 위력 역시 근거리에서의 관통력은 뛰어나지만 유효사거리는 오히려 잉글리쉬 롱보우보다 짧다. 게다가 무게가 매우 무겁고 거기에 파비스라는 방패까지 짊어지고 행군을 해야 했으므로 몇 시간 행군하면 완전히 녹초가 된다. 또 한 가지 약점을 추가한다면, 제노바 복합석궁은 잉글리쉬 롱보우와 비교해볼 때 엄청나게 값비싼 무기였다.

  전투는 시작부터 막장판으로 치달았다. 전장에 도착한 필리프6세는 언덕 위에서 노려보는 잉글랜드의 궁수들이 거슬렸는지 지휘관에게 엄숙하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제노바 인들로 하여금 선봉에 서서 하느님과 성 드니(Saint Denis)의 이름으로 전투를 시작하도록 하라!"
  이 명령을 받은 제노바 석궁병들 사이에 불평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무거운 석궁을 지고 30km를 행군해서 이제 막 도착한 형편이었다. 조금이라도 빠른 행군을 위해 파비스(방어를 위해 궁수의 앞에 설치하는 방패)는 따로 마차로 운반시켰다.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일단 휴식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쳤다. 다행스럽게도 갑자기 벼락과 함께 소나기가 지나가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후 필리프6세는 전방에 제노바 석궁병을 배치하고, 그 뒤쪽에 기사단과 창병을 배치했다. 하지만 제노바 석궁병들에겐 따로 운반시킨 파비스를 가져다 앞에 설치할만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위에 언급했듯이 제노바 복합석궁의 위력은 근거리에서 강력하기 때문에 적의 화살을 방패로 막으며 조금이라도 더 전진해서 사격해야 한다. 즉, 파비스가 없이는 원거리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필리프6세는 부대배치를 끝낸 후 불만 많은 제노바 석궁용병들에게 전진명령을 내렸다. 이 용병들의 숫자만으로도 이미 잉글랜드군의 숫자를 웃돌았다. 제노바 석궁병들은 전진하며 명령에 맞춰 큰 함성을 내질렀지만 잉글랜드군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아직 유효사거리에 달하지 못한 것이다. 제노바 석궁병들이 4번째 함성을 내질렀을 때 잉글랜드 군은 일제히 한 발자국씩 내디디며 석궁병을 향해 활을 쏘아댔다. 파비스가 없이 전진하던 석궁병은 큰 혼란에 빠졌다.
  애초에 용병으로 고용된 병사들이다. 이들에게 애국심이나 희생정신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제노바인들은 대형을 어지럽히며 달아나기 시작했고, 이 모습을 보고 격분한 필리프는 도망가는 병사를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기사단은 이제 잉글랜드군이 아닌 제노바군에게 돌진해갔다. 그 와중에도 잉글랜드군의 사격은 계속되었다. 화살은 충성심 부족한 제노바 석궁병만 맞추고 고귀한 프랑스 기사단을 비껴갈 리 없다. 프랑스군은 시작부터 큰 피해를 입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제노바 석궁병이 와해되자 프랑스군의 공격은 지극히 기사다운 방식이 되었다. 기사단이 잉글랜드군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이들도 잉글리쉬 롱보우의 먹이감이 되었고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에게는 창과 긴 칼로 무장한 잉글랜드 보병들의 마지막 일격이 가해졌다. 너무나 무력해 보였지만 그래도 프랑스 기사단의 숫자가 워낙 많았다. 잉글랜드군의 중앙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해 들어갈 뿐이었다. 장엄하기는 해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엄청난 화살비를 뚫고 올라간 기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효과적으로 설치된 장애물과,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휴식으로 인해 힘이 넘치고 있는 잉글랜드 보병기사단,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는 창병이었다. 전투는 궁사들로부터 근접 조준사격을 통해 엄호받고 있는 잉글랜드가 훨씬 유리했다.

  이날의 전투는 대략 오후 4시경에 시작되어, 자정경에 필리프와 프랑스군이 부상자들을 수습해 퇴각함으로써 끝이 났다. 프랑스 기사단은 잉글랜드군에 대해 14~16회에 걸쳐 돌격을 감행했으며, 잉글랜드 궁수들에 의해 발사된 화살의 총 숫자는 50만 발을 상회했다.
  이 전투로 인해 잉글랜드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주력인 기사단 전술에 대해 심각한 의문점을 제기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사단 위주의 전술에 대해 본격적으로 전략적인 평가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체제가 그렇듯이 군사전략 역시 일종의 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전반적으로 수정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희생이 필요하다.

  크레시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군이 입은 손실은 승자인 에드워드3세가 탄식할 정도로 엄청났다. 전사자만 프랑스와 동맹국의 왕족 11명, 기사 1200명, 보병 8천명에 달했다. 잉글랜드의 전사자는 몇백명 정도로 끝났다.
  이 이후로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몇십년간 유럽 최고의 전투부대로 명성을 높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의 활약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프랑스 기사단의 돌격이 중앙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가장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곳도 바로 흑태자가 있는 중앙쪽이었다. 잉글랜드 궁수들의 요격에도 불구하고 병력의 우위에 있던 프랑스 기사들은 흑태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잉글랜드 좌우익의 군사들 역시 중앙을 지원하기 위해 출격해야만 했다.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전령이 후방의 에드워드3세에게 달려갔다.
  "현재 워리크 백작, 옥스퍼드 백작, 레이놀드 코햄 경 모두가 왕자 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만, 폐하와 폐하의 기사단이 지원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두 예상하고 있듯이 만약 프랑스군이 증원된다면 폐하의 아드님과 그들은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국왕이 물었다.
"왕자가 죽었느냐?"
"아닙니다."
"심하게 다쳤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말에서 떨어졌느냐?"
"아닙니다만 폐하, 대단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자와 너를 보낸 그들에게 돌아가 이렇게 전하라. 내 아들이 살아있는 한 더 이상 전령을 나에게 보내지 마라.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또 이렇게 전하라. 그들은 왕자로 하여금 전공을 세우도록 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이 전투와 그에 따르는 영광이 내 아들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의 것으로 하도록 할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이 전투에서 승리자의 영예를 얻은 사람은 왕이 아닌, 이제 16살인 흑태자 에드워드였다.
  17세에 칼레에서 다시 한 번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27세에는 아키텐에서 프랑스 국왕인 쟝 2세를 생포함으로써 프랑스를 굴복시켰다. 30세에 영토 내의 반란을 진압한 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천명을 모두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국왕과 귀족들에 대해 겸손한 태도로 기사다움을 과시했지만, 평민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을 보면 그는 지극히 중세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후 36~37세에 스페인 정벌에 나섰다가 전염병에 걸려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죽었다.


  4. 아쟁쿠르(Agincourt) 전투


<붉은색이 영국군. 좌우 십자포화 종사배치가 눈에 띈다>

  전투는 1415년 10월 25일에 일어났다. 전투지역은 뺵뺵한 숲 사이로 난 부드러운 땅으로 이루어진 아쟁쿠르이다. 영국군 약 6000명(거의 80%가 장궁), 프랑스군 약 20000~30000명.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헨리5세에게 투항할 기회를 주었으나 헨리 5세는 그 권고를 거절하였다. 병력도 프랑스군이 3배 이상 많았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사령관인 샤를 달브레는 먼저 공격하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의 기사들은 당장 공격명령을 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사령관은 공격명령을 내린다.
  적의 무기가 무엇이건 일단 수적으로나 무장 상태로나 모든 것이 프랑스군이 우세하였다. 프랑스는 기사들만 8000명이고, 그에비해 영국군은 궁수는 5천이요, 최전방에서 기사들의 공격으로부터 궁수들을 방호해줄 무장병은 1000명에 불과했다. 무장병들이 섬멸당한다면 영국측 진영은 그야말로 학살의 현장이였을 것이다.

  곧 프랑스의 1전단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전날에 내린 많은 비로 인해 땅은 진흙뻘이었고 좌우의 우거진 숲으로 인해 옆을 치지도 못하는 터라 중앙에 엄청나게 몰려서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사들은 자신들의 가장 강한 전법인 기병돌격을 시작하였다.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자 헨리5세는 곧 사격 신호를 보냈다. 프랑스 기사단이 잉글리쉬 롱보우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사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군은 중앙에 지나치게 몰려있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물이 되었고 곳곳에 설치된 목책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진흙에서 갑옷의 무게로 인해 영국군보다 중무장인 프랑스군은 느려졌고, 장궁병의 손쉬운 타겟이 되었다.
  이윽고 2전단이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혼란스러운 프랑스군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 할 뿐이었다. 결국 프랑스 기사들은 하나둘씩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하였고, 그나마 남아 있던 기사들은 도끼와 창으로 무장한 영국의 보병기사단에게 도륙당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천여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당시 명망 높던 프랑스의 대귀족들도 매우 많이 전사하였다. 포로만도 1,500명을 넘었다. 영국군도 1,600여명이라는 간과하지 못할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1,500여명이라는 포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영국군은 1,500여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을 포로로 삼아 먹여주고 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 기사들은 전장에서 잡히는게 치욕도 아니었고 몸값 때문에 오히려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헨리 5세는 포로들을 모두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을 제외한 영국군들의 지휘관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포로들의 처분은 승자의 것이지만 막대한 몸값과 당시 무장해제된 기사들을 처단하는 것은 도리에 크게 어긋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프랑스 포로는 모두 처형되었다.

  아쟁쿠르 전투는 당시 유럽에 있어서는 꽤나 파격적인 포로 기사의 처단으로 인해 꽤나 그 당시의 유럽의 질서를 깨뜨린 전투라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투의 최종 결과는 영국 수백명 사망, 프랑스 수천명 사망. 프랑스군 사망자는 대부분 후퇴하지 않고 전장에 남은 기사단과 포로로 잡힌 기사단의 처형으로 생긴 숫자였다.


  5. 마치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자신이 정말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여러 공신된' 자료를 뒤적이고 말하였으면 한다. '출처는 어디선가 들은거', '출처는 누군가가 말한거. 누군지는 기억안남'을 근거로 따지고 들면 참으로 곤란하다.

  한 예로 100년전쟁에서 사용된 활과 석궁에 관한 것이 있다. 사실 영국의 중세무기 하면 잉글리쉬 롱보우를 떠올림에도 다들 석궁때문에 100년전쟁에서 유리했다라고 한다. 주장의 근거는 이원복씨가 그린 먼나라 이웃나라였다. 그 분이 만화에서 석궁때문에 프랑스 기사단은 그냥 죽었다라고 써 놓은 것을 확인도 안하고 그대로 믿고 주장한다.
  물론 석궁도 영국군에서 쓰였고 그 석궁이 갑옷을 관통해서 기사를 죽였을 수도 있겠지만 잉글랜드의 주력무기는 롱보우와 보병단이다. 이건 역사서적 몇개만 뒤적거려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공신되지 않은 자료를 근거로, 자신이 여러 자료를 보고 확인해보지 않은 것을 근거로 해서 역사를 논하는 것은 삼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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