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장>

  1. 서군으로 참전한 장수.


  (1)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1560-1600, 4820명)

  통칭 사키치(佐吉). 토요토미가(豊臣家)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
  오미국(近江国) 이시다무라(石田村) 출신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동에서 시작해, 히데쯔구(秀次)가 실각한 후에는 오미(近江) 사와산(佐和山) 성주가 되어 19만 4천석에 봉해진다. 히데요시(秀吉) 사망 후인 케이쵸(慶長) 4년 윤 3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가 죽자 임진왜란으로 인해 원한을 품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위시로 한 제장들에게 습격을 받고, 중재역으로 나섰던 이에야스(家康)의 재단(裁断)으로 사와산성(佐和山城)에 은거하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는 서군의 실질적인 지휘관으로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지만 연합군의 지휘체계 혼동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등의 배반으로 인해 대패한다. 탈출 중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의 손에 붙잡혀 10월 1일,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등과 함께 쿄토(京都) 로쿠죠가와하라(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2) 시마 키요오키 (島清興, ?-1600, 1000명)

  카츠타케(勝猛)라고도 하며, 시마 사콘(島左近)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야마토(大和)의 쯔쯔이 쥰케이(筒井順慶)에게 사사하였으나 쥰케이(順慶)가 사망한 후 히데요시(秀吉)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에게 사사한다. 역시 히데나가(秀長)의 사(死) 후에는 그의 아들인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保)에게 사사하면서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였다. 히데야스(秀保)가 사망한 후에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에게 후한 녹봉으로 등용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한 후, 사콘은 주인인 미쓰나리에게 종종 이에야스(家康)의 암살을 진언하기도 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는 미쓰나리 휘하의 무장으로서 참전하여 전초전이었던 쿠이세강(杭瀬川)의 전투에서는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군에게 기습을 감행, 서군의 사기를 높이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본전(本戦)에서는 전선에서 철포부대와 창부대를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면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등의 부대와 격전을 펼쳤다.
  사콘은 선전(善戦)했지만, 측면으로 우회하여 온 쿠로다(黒田) 부대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게 된다. 그 후 응급처치를 한 후 마지막까지 분전하였으나 전사하고 만다. 전장에서 탈출하여 살아남았다는 설 등도 있지만, 어쨌든 사콘의 부상은 서군에 있어서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미쓰나리(三成)에게는 과분한 자」라는 노래가 민중들 사이에 유행할 정도로 명장(名将)이었다고 전해진다.


  (3) 가모 사토이에 (蒲生郷舍, ?-1600, 1000명)

  시마 사콘(島左近)에 버금가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배하의 용장.
  오미(近江) 지방의 요코야마촌(横山村) 출신으로 원래는 요코야마 키나이(横山喜内)라고 칭하였으며 로카쿠(六角) 가문에 사사했다. 로카쿠(六角) 가문이 멸망한 후에는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 우지사토(氏郷) 친자에게 사사하게 된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시마즈(島津) 가문 정벌 당시 우지사토(氏郷)와 함께 큐슈(九州)로 건너가 전공을 세운다. 우지사토가 아이즈(会津)의 넓은 영지로 이동하였을 때 다테(伊達) 가문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치시오가와성(地塩川城)을 하사 받고 1만 3000석에 봉해진다. 가모(蒲生)라는 성씨도 하사 받게 된 키나이(喜内)는 "가모 빗츄노카미 사토이에(蒲生備中守郷舎)라고 개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지사토의 아들인 히데유키(秀行)의 대(代)가 되자 가문 안에서 내분이 발생, 가모(蒲生) 가문은 우토노미야(宇都宮)의 18만석으로 감봉되었고 다수의 낭인이 발생하게 된다. 사토이에도 낭인의 신분이 되었고 그 후 아들과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에게 높은 봉록으로 등용되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도 시마 사콘(島左近)과 함께 이시다 부대의 전선에서 활약하며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 등의 부대와 격전을 치루었다. 특히, 사콘이 부상으로 인해 후방으로 후퇴하였을 때에도 이시다(石田) 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활약이 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시다 부대의 대포에 의해 한 때 전국(戦局)이 서군(西軍)으로 기울었을 때에도 사토이에(郷舎)는 동군의 각 부대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이윽고 서군의 패배가 거의 확정되자, 오다 유우라쿠(織田有楽)의 진(陣)으로 단독으로 돌격하여 배하의 부하와 싸워가면서 전사한다.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배하의 무장으로서 분전했던 요코야마 키나이(横山喜内)가 실제로 가모 사토이에(蒲生郷舎)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史料)로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4)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1535-1619, 1658명)

  시마즈씨(島津氏)의 17대 당주(当主)로, 시마즈씨(島津氏)를 큐슈(九州) 최대, 최강의 전국 다이묘로 격상시켰던 무장이었다. 외교전략이 뛰어나, 히데요시(秀吉)가 큐슈(九州) 정벌에 나섰을 때 영토를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서군에 속해 이에야스(家康)와 대치하였으나 영토는 한 조각도 빼앗기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명문 시마즈씨(島津氏)는 서남(西南)의 웅번(雄藩)으로써, 막부 말기까지 지속될 수 있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는 그 기초를 닦아 올렸던 것이다.


  (5) 코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1600, 6000명)

  호상(豪商), 코니시 타카사(小西隆佐)의 아들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秀吉)에세 상(商) 재능을 높이 평가 받아 등용되었다.
  1583년 경에는 200석의 지행(知行)을 받고 있었다. 다음 해인 1584년 산기(讃岐) 쥬가와성(十河城)에 병량미를 운송하는 공을 세웠고 다음 해 종오위하셋쓰노카미(従五位下摂津守)에 임명되었다. 1586년 큐슈(九州) 정벌에서는 선두에 서며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진소에 출장하면서 군의(軍議)를 실행하였다. 이듬 해 4월, 사쓰마(薩摩)의 헤이사성(平佐城) 공격에서 활약한다. 토야마(富山)에서 옮겨 온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의 히고(肥後) 영내(領内)에서 국인일규(国人一揆)가 일어나자 카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함께 진압하였고, 이로써 히고(肥後) 우토성(宇土城) 15만석을 받게 된다.
  유키나가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돈 아우구스틴"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었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하였으나 패한 후 포로로 잡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과 함께 쿄토(京都)에서 처형되었다. 카톨릭에서는 자살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패전 후 자결하지 않았다고 한다.


  (6)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1572-1655, 17220명)

  나오이에(直家)의 차남.
  1572년 히데요시(秀吉)의 빗츄(備中) 타카마츠(高松) 공격에 협력하면서 빗츄의 동쪽 절반인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2국(国) 합계 50여 만석을 하사 받게 되었다. 그 후 히데요시(秀吉)의 양녀(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큐슈(九州) 정벌 후 종삼위참의(従三位参議) 겸(兼) 좌근위권중장(左近衛権中将)으로 취임하였다. 그 사이에 히데요시(秀吉)의 국내평정, 임진왜란에 종군하였다. 오카야마성(岡山城)과 죠카마치(城下町:성 아래에 형성되는 마을)의 정비, 개척 등 소유 영지를 경영하면서 1594년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5대로(五大老)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 1606년 하치죠시마(八丈島)에 유배되었고 그 유배생활로 50년을 보냈다.


  (7) 오오타니 요시쯔구 (大谷吉継, 1559-1600, 600명)

  아버지 요시후사(吉房)는 오미국(近江国) 슈고(守護)인 로카쿠 요시마사(六角義賢)에게 사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시쯔구(吉継)가 언제부터 히데요시(秀吉)에게 시동으로서 사사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한 로카쿠씨(六角氏) 정벌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583년 시즈카타케(賤ヶ岳) 전투에서 칠본창(七本槍)에 버금가는 무공을 올렸고 2년 뒤인 1585년에는 이미 에치젠(越前) 5만석을 얻고 있었다. 큐슈(九州) 원정(遠征)에서는 병량봉행(兵糧奉行)을 맡기도 했던 요시쯔구(吉継)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과 함께 각지의 검지(検地)를 실시하는 등, 군사적인 면 보다는 내정에 능력을 보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하였다. 병(病) 때문에 가마에 탄 상태로 출병하였다고 전해진다. 동군에 내응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군대의 습격을 받고 분전하던 끝에 자결한다.


  (8) 오오타니 요시하루 (大谷義治, ?-1615, 3500명)

  요시카츠(吉勝)라고도 불리운다.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의 장남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사사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출진하지만 서군이 패한 후 전장을 이탈, 각지를 유랑한다. 1614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름에 응해 오사카성(大坂城)으로 입성, 이듬해 오사카성 여름전투에 참전하였으나 5월 7일 텐오지(天王寺)에서 전사하였다. 사망했을 당시 50세 전후로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연령상으로 요시쯔구(吉継)의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


  (9) 토다 시게마사 (戸田重政, ?-1600, 1500명)

  카츠나리(勝成), 카츠시게(勝重)라고도 불리운다.
  초기의 토요토미(豊臣) 정권에 사사하면서 이요(伊予) 오오즈(大洲) 7만석의 영주가 된 토다 카츠타카(戸田勝隆)의 동생. 시게마사는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를 사사하였으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멸망한 후 에치젠국(越前国)의 주인이 된 나가히데(長秀)의 배하에서 아고성(安居城)의 성주(城主)로 1만석의 영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1585년, 나가히데(長秀)가 사망한 후 니와(丹羽) 가문이 에치젠(越前)에서 이주한 후에도 영지를 보전받고 토요토미(豊臣) 가문의 직속 다이묘가 되었으며 큐슈(九州) 정벌,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임진왜란에 종군하였다. 1594년 후시미성(伏見城)의 축성공사를 분담하면서 1만석의 영지를 추가로 하사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하면서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와 함께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長)를 격파한 후 군을 이동시켜 9월 15일의 결전에 참가, 분전하였으나 전사하고 만다. 시게마사(重政)는 「모재준웅(謀才俊雄)의 영사(英士)」로 추앙받으면서 동군의 제장(諸将)들도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10) 히라츠카 타메히로 (平塚為広, ?-1600, 360명)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가신으로서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임진왜란 등에 종군한다. 1595년 5천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1600년 미노(美濃) 타루이(垂井)의 1만 2천석을 하사받으면서 다이묘(大名)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가, 후시미성(伏見城) 공격에 참가 호쿠리쿠(北陸)로 나아가며 카가(加賀)의 마에다(前田) 세력과 대치한 후 미노(美濃)에 침공하였다. 9월 15일의 결전에서는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 토다 시게마사(戸田重政)와 함께 분전하였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배반으로 인하여 전사하고 만다. 전 후 영지는 몰수되었다.
  타메히로(為広)는 일찍부터 코바야카와군(小早川軍)의 동향을 의심, 히데아키(秀秋)암살을 시도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11) 키노시타 요리쯔구 (木下頼継, ?-1600, 750명)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의 차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가신으로 에치젠(越前) 내(内)의 2만 5천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키노시타(木下) 성(姓)을 하사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 7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분전. 서군이 패한 후 도주에 성공, 영지로 귀환하였으나 병으로 사망하였다. 요시쯔구(吉継)의 조카라는 설도 있다.

 

  2. 서군이었으나 동군에 내응한 장수


(1) 키츠카와 히로이에 (吉川広家, 1561-1625, 3000명)

  키츠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삼남(三男). 이즈모(出雲) 후쿠타성(富田城)의 성주(城主).
  1586년 아버지 모토하루(元春)가 1586년 병사하였고 이듬해 가독(家督)을 계승했던 형 모토나가(元長)도 큐슈(九州) 정벌을 위한 출진중 휴우가(日向)에서 병사하면서 모토나가(元長)의 유언에 의해 가독(家督)을 상속 받게 되었다. 이 때 테루모토(輝元)로부터 모리(毛利) 가문의 유서 있는 글자인 「히로(広)」를 하사 받고 이름을 히로이에(広家)로 개명하였다.
  1591년 호오키국(伯耆国), 이즈모국(出雲国)의 일부에 더해 오키국(隠岐国)을 하사받으면서 이즈모(出雲) 츠키야마(月山) 후쿠타성(富田城)의 성주(城主)가 되어 14만석의 영지를 소유하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도 참전하였으며 전란 도중 카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의 무단파(武断派)와 뜻을 함께 하며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문사파(文吏派)와 대립하는 감정을 품게 된다.
  히데요시(秀吉)가 사망한 후 1600년 이에야스(家康)의 아이즈(会津) 정벌 당시 병사를 이끌고 오사카로 향한다. 그곳에서 본의 아니게 서군으로 가담하면서 동군과도 내통하였다. 이 때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로부터 모리(毛利) 가문의 영지 보전을 약속받고, 서군을 따르던 히로이에(広家)는 어쩔 수 없이 이세(伊勢) 안노즈성(安濃津城)을 공격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난구산(南宮山)에 진을 치고 모리군(毛利軍)의 참전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이에야스(家康)는 모리(毛利)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여 히로이에(広家)에게 스오(周防), 나가토(長門) 이국(二国)을 하사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히로이에(広家)는 종가를 몰락시킨 책임감 때문에 그 영지를 테루모토(輝元)에게 하사하도록 주선하였으며 어렵게 이에야스(家康)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스오(周防), 나가토(長門) 이국(二国) 36만 9천석이 모리(毛利) 가문에게 하사되었고 히로이에(広家)는 스오(周防) 이와국(岩国) 6만석을 소유하였다.
  1601년 바닷길로 귀국한 히로이에는 이와국(岩国)을 거소(居所)로 하고 요코야마(横山)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7년 후 완성하였으나, 후에 일국일성(一国一城) 명령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1614년 오사카 겨울전투 때에는 히데요리(秀頼)로부터 오사카 입성을 부탁받으나 거부하였다. 2000의 병력을 이끌고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였다.


  (2)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秋, 1582-1602, 15675명)

  키노시타(木下) 가정의 오남(五男)으로, 초명은 히데토시(秀俊)였다. 키타노 만도코로(北政所:히데요시의 처)의 조카. 세 살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으나, 히데요리(秀頼)가 탄생하면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양자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독촉과 농간에 의해 전쟁이 한창일 때 서군을 배반하면서 동군이 대승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 후에 제장(諸将)들로부터 백안시되면서 실의에 빠져있던 중 결국 케이쵸(慶長) 7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히데아키의 죽음과 더불어 코바야카와(小早川) 씨의 본종가(本宗家)는 단절된다. 일설에 의하면 미쳐 죽었다고도 한다.


  (3)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1554-1626, 990명)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가신이었던 야스아키(安明)는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칸온지성(観音寺城) 공격에 참가 전사하였다. 야스하루(安治)도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가신이었지만, 이윽고 오타니성(小谷城)의 나가마사(長政)를 공격하는 히데요시(秀吉)의 가신이 되어 1570년 히데요시로부터 말 한필을 수여 받는다. 1583 년 시즈카다케(賤ヶ岳) 전투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政則)등과 함께 일번창(一番槍)의 공명(功名)을 올리면서 이른 바「시즈카다케(賤ヶ岳)의 7본창(本槍)」으로 불리었으며 3000석의 영지를 수여 받았다. 이후 출세를 거듭하면서 셋쓰국(摂津国) 노세(能勢) 1만석, 이윽고 아와지국(淡路国) 슈혼(洲本) 3만석의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에 이어서 동군에 가담, 영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슈혼(洲本)의 영지와 함께 하리마국(播磨国) 류노성(龍野城)의 성주가 된다.


  (4) 쿠츠키 모토쯔나 (朽木元綱, 1549-1632, 600명)

  오미국(近江国), 쿠츠키야(朽木谷)의 영주.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의 봉행중(奉行衆)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선조 대대로 쿠츠키야(朽木谷)를 영지로 하고 있었다.
  1570년,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에게 배반을 당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카나가사키(金ヶ崎)에서 와카사가도(若狭街道)를 거쳐 쿠츠키야(朽木谷)를 넘어 쿄토(京都)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 때 모토쯔나(元綱)가 노부나가를 보호하였다. 이후 오다(織田) 가문의 가신이 되지만,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않는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참가하면서 가명(家名)을 유지할 수 있었다.


  (5) 오가와 스케타다 (小川祐忠, ?-1601, 2100명)

  이요(伊予) 후츄성(府中城) 성주(城主). 1582년 혼노지(本能寺)의 변(変) 후 야마사키(山崎) 전투에서는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 속해 싸웠으나, 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에 속하면서 카츠이에(勝家)의 양자인 카츠토요(勝豊)의 가로(家老)를 지냈다. 이듬해 시즈카타케(賤ヶ岳) 전투에서는 카츠토요(勝豊)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측으로 참전하였기 때문에 스케타다(祐忠)도 히데요시(秀吉) 편이 되어 싸웠다.
  카츠토요(勝豊) 사망 후에는 히데요시(秀吉)에게 사사하면서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 등에도 참가하였다. 1590년 이요(伊予) 후츄(府中) 7만석의 성주가 되었으며 1593년 임진왜란에도 출병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하였으나,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가담하였다.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후 벌(카이에키(改易) : 영지를 가문을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전락시키는 벌)을 받고 이듬 해 사망하였다.


  (6) 아카자 나오야스 (赤座直保 , ?-1606, 600명)

  통칭(通称)은 쿠베에(久兵衛). 1590년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당시에는 히데요시(秀吉)에게 종군하면서 무사시이와키성(武蔵岩槻城)과 시노부성(忍城) 공격을 감행하였다. 전 후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에치젠국(越前国) 2만석을 하사 받지만, 성(城)을 하사받지는 못하고 관(館)에 거주하게 된다. 에치젠(越前)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들어와 있을 때는 히데아키(秀秋)의,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가 들어 와 있을 때는 요시쯔구(吉継)의, 각각 여력 다이묘(与力大名)의 지위였다.
  따라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그 상태로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의 배하에서 서군으로서 참전하게 되었다. 마쯔오산(松尾山)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배반을 일으켰을 때, 그를 따라서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를 공격하였다.
  전 후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는 배반에 대한 은상(恩賞)없이 영지를 모두 잃었으며 그 후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에게 사사했다.

 

  3. 서군이었으나 전투에 불참한 장수


  (1) 모리 히데모토 (毛利秀元, 1579-1650, 16000명)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넷째 아들인 호이다 모토기요(穂田元清)의 아들로서 비츄(備中) 사루켄성(猿懸城)에서 태어났다. 무장으로서도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를 대신해 모리(毛利) 군단의 총대장으로서 출진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전군(全軍)의 총지휘관으로서 출진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토요토미(豊臣)측에 속하여 후시미성(伏見城) 공격에 참가하였으나 전 후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호쵸(防長) 2주(州)로 감봉당하자, 히데모토(秀元)는 테루모토(輝元)에게 나가토(長門) 영내(領内) 3만 6천 2백석을 나누어 받고 초대(初代) 나가후번(長府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1602년 쿠시자키성(櫛崎城)을 재건축하고 이를 거성(居城)으로 하면서 근세 죠카마치(城下町 : 성 아래 형성되는 마을)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러나 1615년 일국일성(一国一城) 명령에 의해 쿠시자키성(櫛崎城)의 파괴하고 인근 땅에 거관(居館)을 만들었다.
  1650년 윤 10월 3일 에도(江戸)에서 72세를 일기로 사망, 이즈미타케사(泉岳寺)에 매장되었고 나가후(長府)의 쿠우산사(功山寺)로 이장되었다.


  (2) 안코쿠지 에케이 (安国寺恵瓊 , ?-1600, 1800명)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는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초진(初陣)에서 멸망한 아키국(安芸国) 슈고(守護)인 타케다씨(武田氏)의 지류라고 전해진다. 아키국(安芸国) 타케다씨(武田氏)가 멸망했을 때, 토후쿠사(東福寺) 말사(末寺)인 아키(安芸) 안코쿠지(安国寺)에서 도망쳐 후에 모리씨(毛利氏)의 신하가 되어 외교승(外交僧)으로서 활약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가문 중에서는 키노시타 토기치로(木下藤吉郎 : 나중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모리씨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비교적 빨랐다고 할 수 있다. 히데요시(秀吉)와의 접촉할수록 에케이(恵瓊)는 노부나가(信長)와 히데요시(秀吉)의 인간성을 꽤뚫어 보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위험한 성격에 대해 히데요시의 기민함을 간파한 에케이는 노부나가의 세상이 길어야 4, 5년 안에 끝날 것으로 보았다. 그에 반해 히데요시는 주목해야할 인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노부나가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히데요시는 아직 하급부장이었던 시대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에케이가 선견지명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야기해 준다.
  하지만 에케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운명에 대해서는 잘못된 예견을 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주인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를 설득해 서군의 주장(主将)으로 격상시켰으나, 서군의 패배와 더불어 결국 모리씨(毛利氏)의 세력은 축소되었으며 에케이는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3) 나츠카 마사이에 (長束正家, ?-1600, 1500명)

  토요토미(豊臣) 정권(政権)의 오봉행(五奉行) 중 한 사람.
  처음에는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의 가신이었으나 히데요시(秀吉)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토요토미(豊臣) 가문에 사사했다. 경리(経理)에 밝아, 산술역으로서 근무했다.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서는 병참보급도 담당, 그 원활한 수송은 이에야스(家康)를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태각검지(太閤検地)에서도 활약, 오미(近江), 미즈구치(水口)의 12만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에는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 등이 농성하고 있던 후시미성(伏見城) 공략에도 참가하여, 성 내부에 있던 코오가슈(甲賀衆)와 내응하면서 승리 요인을 만들었다. 본전(本戦)에서는 난구산(南宮山)에 진을 쳤지만, 모리(毛利) 세력에 의해 길을 차단 당하면서 결국, 동군의 후방을 칠 수 없었다. 서군이 패퇴한 후 본거지인 미즈구치(水口)로 돌아오지만, 곧 동군의 세력이 다가오자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살했다.


  (4) 쵸소카베 모리치카 (長宗我部盛親, 1575-1615, 6660명)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하였지만, 패전과 함께 토사(土佐) 지방의 우라토성(浦戸城)으로 도주하였다. 아버지 모토치카(元親)와 막역한 사이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에게 부탁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중재 받으려는 속셈으로 상락(上洛)하였으나, 오히려 모든 영지가 몰수되고 만다. 22만석의 다이묘에서 하룻밤 만에 낭인의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1614년 구령(旧領)이었던 토사국(土佐国)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오사카(大坂) 전투에서 토요토미(豊臣) 측으로 가담하여 승리한 후 영지를 되찾는 다는 계산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로부터 전후 토사(土佐) 일국(一国)을 하사 받는 다는 약속을 한 후 오사카성(大坂城)으로 입성하였다. 오사카성(大坂城)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아카이시 테루즈미(明石全登), 고토 모토쯔구(後藤基次), 모리 카츠나가(毛利勝永) 등과 함께 「오사카성(大坂城)의 5인중(人衆)」으로 불리었다.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 동군의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부대의 별대(別隊)를 이끄는 토도 타카나리(藤堂高刑)를 시작으로 대장급 무사 60여 명과 병졸 200여 명을 쓰러트리는 대전과(大戦果)를 올렸다. 하지만, 결국 오사카성 전투도 이에야스의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후에 붙잡힌 모리치카(盛親)는 패전의 장수로서 로쿠죠가와하라(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4. 동군으로 참전한 장수


(1)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家康, 1542 - 1616, 30000명)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창시자. 어린 시절에 이마카와(今川) 가문의 인질이 되었다. 그러나, 호송되는 도중에 오다(織田) 군에 납치되어 이 때 처음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만났다고 전해진다. 그 후, 이마카와(今川) 가문으로부터 독립한 이에야스(家康)는 노부나가와 기요스성(清洲城)에 동맹을 맺는다.
  이후, 나가시노(長篠)의 전투에서는 오다(織田) 가문과 함께 타케다(武田)의 기마대(騎馬隊)를 격파했다. 혼노지(本能寺)의 변 이후에는 히데요시(秀吉)와 노부나가 사(死) 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에서 결전하면서 토요토미(豊臣)의 대군을 상대로 선전한다. 그 후 히데요시(秀吉)에게 항복, 토요토미 정권의 유력한 다이묘로서 오대로(五大老)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에는 일본열도의 패권을 얻기 위해 동군(東軍)의 총대장으로서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결전, 승리한다. 1603년, 조정(朝廷)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으로 임명되었고, 에도(江戸)에 막부를 개설했다. 1615년, 오사카(大坂) 여름 전쟁(夏の陣)에서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멸망시키고, 전국(戦国)의 난세(乱世)에 종지부를 찍었다.


  (2) 혼다 타다카츠 (本多忠勝, 1548-1610, 500명)

  토쿠가와(徳川) 사천왕(四天王)의 한 사람. 통칭 헤이하치로(平八郎). 애마(愛馬)인 오니카게(鬼鹿毛)를 타고 명창(名槍)인 카게로기리(蜻蛉斬)를 손에 들고 전투에 임했던 용장(勇将).
  타케다 신켄(武田信玄)의 근습(近習)이었던 코스기 우콘스케(小杉右近助)는 「이에야스(家康)에게는 과분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노부나가 역시「화실(花実)을 겸비한 용장(勇士)」으로 평했다. 군공(軍功)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
  1560년 이에야스(家康)의 오오타카성(大高城)에 병량(兵糧)을 공급하는 임무로 첫 출진. 그 다음 해에는 숙부인 타다마사(忠真)가 적을 쓰러트린 후 타다카츠(忠勝)에게 수급(首級)을 건네 주려고 하자 타다카츠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스스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을 쓰러트리고 왔다. 1572년, 타케다군(武田軍)과의 토토미(遠江) 이치곤자카(一言坂) 전투에서는 신가리(殿 : 후퇴하면서 최후방의 방어를 맡는 역할)를 맡으면 용전하였고, 같은 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에서도 패전중 분투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는 불과 500기(騎)로 하시바(羽柴)의 대군을 상대로 과감하게 맞서면서 히데요시(秀吉)를 경탄시켰다고 전해진다. 칸토입봉(関東入封) 후 10만석에 봉해지면서 명성(名城)인 오오타키성(大多喜城)을 축성한다.
  그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타다카츠(忠勝)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와 함께 동군제장(東軍諸将)의 군감(軍監)을 맡았다. 세키가하라 본전(本戦)에 있어서도 종횡무진 활약하며 강력한 시마즈(島津) 부대와 격전을 계속하였다.
  전후에는 서국(西国)의 감찰역으로서 이세(伊勢) 쿠와나(桑名)의 10만석에 봉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도 10만석을 받고 있던 타다카츠는 내심 불만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후 가독(家督)을 적남(嫡男)인 타다마사(忠政)에게 물려주고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생애 57번의 전쟁을 치루면서 단 한군데의 상처도 없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는 타다카츠가 적에게 돌진할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전국(戦局)을 파악하면서 때로는 후퇴도 할 줄 아는 명장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이이 나오마사 (井伊直政, 1561-1602, 3600명)

  토쿠가와(徳川) 사천왕(四天王)의 한 사람.
  나오치카(直親)의 아들. 아버지의 사망 후, 유소년이었던 나오마사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니이노 치카노리(新野親規)의 양자가 된다. 하지만, 치카노리가 전사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재혼한 가문인 마쓰시타 키요카게(松下清景)에게 맡겨지는데, 1573년 매사냥을 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발탁되어 토쿠가와 가문에 사사하게 된다. 이에야스가 나오마사의 아버치인 나오치카와도 친분을 맺고 있었던 점도 작용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후, 타케다(武田) 가문과의 전투였던 카이(甲輩), 시나노(信濃) 평정을 위한 전투에서도 활약하였다. 타케다의 구신(旧臣)을 배하 무장으로 받아들이면서, 야마나카 마사카게(山県昌景)의 아카조나에(赤備え:모든 군의 장비를 붉은색 일변도로 갖추는 것) 군장(軍装)을 계승하여 「아카조나에(赤備え)의 이이(井伊) 부대」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전투가 있을 때 마다 나오마사는 선봉(先鋒)을 자신의 정위치(定位置)로 삼게 된다.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분전하면서「이이(井伊)의 붉은 혼(赤鬼)」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칸토입봉(関東入封) 후에는 토쿠가와(徳川) 가신단(家臣団) 중 최대의 영토인 12만석에 봉해진다. 당시 나오마사의 나이 29세, 파격적인 출세였던 것이다.
  나오마사는 호죠(北条) 씨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의 외교 사절역을 맡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군감(軍監), 서군제장(西軍諸将)의 설득과 전후처리도 담당하는 등 외교적인 활동도 발군이었다. 세키가하라 본전(本戦)에서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와 함께 돌격하면서 개전의 불을 쏘아 올렸으며 격전을 계속하였으나, 철수하는 시마즈(島津) 군을 추격하던 도중 부상을 입고 만다.
  전후,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예전 영토였던 오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의 18만석을 받게 된다. 그러나 1602년,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패혈증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가 단 한 군데의 부상도 없었던 것에 비해 나오마사(直政)는 만신창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나오마사가 아카조나에(赤備え)로서 항상 선봉에 서서 군사를 이끄는 대장이었기 때문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마쓰다이라 타다요시 (松平忠吉, 1580-1607, 3000명)

  유명(幼名)은 후쿠마츠(福松).
  타다요시(忠吉)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넷째 아들로 1580년 토토미국(遠江国) 하마마츠성(浜松城)에서 태어났다. 1581년 11월 도죠(東条)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이에타다(家忠)가 사망한 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후계자가 되어 타다야스로 개명, 스루가(駿河) 미마키바시(三枚橋) 성주의 대를 잇게 된다. 1592년 2월에 켄푸쿠(元服 : 성인식)를 한 후 타다요시(忠吉)라고 칭하면서 무사시국(武蔵国) 오시성(忍城) 10만석을 하사 받는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칸토(関東)로부터 토카이도(東海道)를 공격해 올라가는 군세(軍勢)의 총대장을 맡았다. 본전(本戦)에서는 왼쪽에 장인,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오른쪽에 쯔쯔이 사다쯔구(筒井定次)와 나란히 서군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대치하였다. 이 때 나오마사(直政)와 함께 정황을 보러 나간다는 거짓말로 선봉을 맡았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부대 앞으로 나아가 서군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부대에 발포(発砲)하면서 개전(開戦)의 서막을 열었다. 패전한 서군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퇴각할 때, 추겨전을 벌이면서 시마즈(島津) 부대를 계속 공격하던 타다요시(忠吉)는 마쓰이 사부로베(松井三郎兵衛)를 베었으나 자신도 부상을 입게 된다.
  전공(戦功)의 대가로 오와리(尾張) 기요스성(清洲城) 62만석을 하사받는다. 1601년 3월 종사위하시종(従四位下侍従)에서 1605년 4월 종3위(従三位)로 승진하였고, 좌근위권중장(左近衛権中将)으로 임명되었다. 1606년 사쯔마노카미(薩摩守)가 되었다. 1607년 정월 산킨코다이(参勤交代)를 위해 에도(江戸)로 나서며 오오쿠보 타다쯔네(大久保忠常)의 저택에서 숙박하게 되나, 2월에 발생한 고열로 인해 3월 5일 사망하게 된다. 형인 히데타다(秀忠)는 여러번 병문안을 위해 방문하였고 타다요시(忠吉)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5) 쿠로다 나가마사 (黒田長政, 1568-1623, 5400명)

  요시타카(孝高)의 적자(嫡子)로, 유년기를 노부나가(信長)의 인질로서 히데요시(秀吉)의 거성(居城)인 나가하마성(長浜城)에서 보내게 된다. 시즈카타케(賤ヶ岳) 전투, 큐슈(九州) 정벌 등에 종군하였고, 1589년에 요시타카(孝高)로부터 가독(家督)을 물려 받으면서 12만석의 영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하면서 사전 내응공작을 통해 군공(軍功)을 올렸고, 치쿠젠(筑前) 52만석을 이에야스(家康)로부터 하사받으며 후쿠오카성(福岡城)을 거성(居城)으로 삼게 되었다. 오사카(大阪) 여름 전투에서도 토쿠가와(徳川)의 편으로 참전하는 등 토쿠가와 가문을 위해 일하며 일관적인 자세를 계속 유지하였다.


(6) 호소카와 타다오키 (細川忠興, 1563-1645, 5100명)

  후지타카(藤孝)의 적자(嫡子).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사사하면서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공략 등에서 이름을 떨쳤다. 혼노지(本能寺)의 변(変)에서는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딸, 타마히메(玉姫 : 호소카와 가라시아(細川ガラシア))를 첩으로 삼았으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 속했다. 이 때부터 가독을 물려받기 시작한다.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군공(軍功)을 세우며 단고(丹後) 미야즈성(宮津城) 11만석의 성주가 된다. 1585년 종사위하시종(従四位下侍従)에 취임했고, 3년 후인 1588년에는 좌근위권소장(左近衛権少将)으로 승진하였다.
  히데요시(秀吉) 사후에는 이에야스(家康)에 속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전공으로(戦功)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40만석을 하사 받았다.


(7) 카도 요시아키 (加藤嘉明, 1563-1631, 3000명)

  젊은 시절부터 카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후쿠시마 마시노리(福島正則)와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 사사했던 무장. 시즈카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의 한 사람. 시즈카타케(賤ヶ岳)에서는 보라색 옷을 입고 분전했다.
  임진왜란 당시, 요시아키(嘉明)는 수군 장수로서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20만석의 영지를 하사 받았다. 아라타(新田) 개발과 이요강(伊予川)의 개착(開削) 등, 민정가(民政家)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 후에는 아이즈(会津) 40만석에 봉해졌으며, 광산개발과 교통망 정비, 특산물 생산 등도 실시하였다. 3대 쇼군(将軍)인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대(代)까지 살면서 갑옷 착용을 위한 첫 의식을 담당하였다.


  (8) 쯔쯔이 사다쯔구 (筒井定次, 1562-1615, 2850명)

  쯔쯔이 쥰코쿠(筒井順国)의 아들로, 쯔쯔이 쥰케이(筒井順慶)의 양자가 된다. 쥰케이(順慶)가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에 속하면서 야마토국(大和国)의 주인이 되었고, 코오리야마성(郡山城)을 거성(居城)으로써 20만석을 지배하였다.
  1584년 영지를 상속받은 사다쯔구(定次)는 이듬해 히데요시(秀吉)의 키슈(紀州) 사이가(雑賀), 네고로(根来) 공격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같은해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이동을 명령받았다. 이 때, 쯔쯔이씨(筒井氏)의 배하에 있던 야마토국(大和国) 국인중(国人衆)의 대다수가 히데요시(秀吉)의 명령을 받고 사다쯔구(定次)를 떠나 새로운 야마토국의 주인이 된 토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히데요시의 동생))에게 사사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 전 후 이에야스(家康)로부터 영지보전을 약속받았으나 1608년 가신이었던 나카보 히데스케(中坊秀祐)가 사다쯔구(定次)의 난행(乱行)을 막부(幕府)에 호소하면서 영지를 몰수당했다. 또한 1615년 오사카(大坂) 전투에서는 토요토미(豊臣) 측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아들 쥰사다(順定)와 함께 할복을 명령받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소동에 대한 진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쯔쯔이(筒井) 가문이 돌연 영지 이동을 명령받고, 처벌까지 받게 된 이유는 사다쯔구(定次) 개인 행동의 불찰로 보기 보다는 쿄(京)에서 가까운 야마토(大和)에 강고한 기반을 갖고 있는 쯔쯔이(筒井) 가문의 존재를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徳川) 양 정권이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타당하다.
  사다쯔구(定次)는 노부나가(信長)가 그 재능을 높이사 발탁했을 정도의 인물로 무장으로서 그리고 문인으로서도 걸출했지만 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찬이기도 하였다. 사다쯔구(定次)를 밀고하여 쯔쯔이(筒井) 가문을 단절시켰던 나카보 히데스케(中坊秀祐)는 막부의 가신이 되어 승승장구하지만, 후에 사다쯔구(定次)의 구신(旧臣)에 의해 암살당한다.


  (9) 타나카 요시마사 (田中吉政, 1547-1609, 3000명)

  요사마사(吉政)는 토요토미 히데쯔구(豊臣秀次)에게 사사하였으나, 히데쯔구(秀次)가 할복한 후 히데요시(秀吉)에게 사사하게 된다.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후 미카와(三河) 오카자키성(岡崎城)의 성주로서 5만 7천 4백석을 하사 받는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하며 전공(戦功)을 세웠음은 물론 미쓰나리(三成)를 체포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야나기가와성(柳川城) 32만석의 영지를 하사받게 된다. 야나기가와(柳川)에서의 요시마사(吉政)는 죠카마치(城下町 : 성 아래에 형성된 마을)의 정비와 새로운 밭의 개발, 치수사업 도로신설 등에 전력을 다하면서 성주(城主)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가로(家老)가 크리스토 교도를 박해하였을 때에는 그 가로를 처벌함으로써 크리스트 교도들을 보호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609년 2월 18일, 에도(江戸)로 향하던 중이던 요시마사는 야마시로국(山城国) 후시미(伏見)에서 62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요시쯔구(吉次)는 아버지인 요시마사(吉政)와의 다툼으로 집을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요시쯔구의 동생인 타다마사(忠政)가 가독(家督)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타다마사가 36세로 숨을 거두었을 당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타나카(田中) 가문은 단절되고 만다.


  (10)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1561-1624, 6000명)

  통칭 이치마츠(市松).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종형제에 해당한다. 시즈카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 의 필두. 무용(武勇)으로 유명한 마사노리(正則)이지만, 병량봉행(兵糧奉行), 검지봉행(検地奉行) 등의 업무를 맡었던 경험도 있었다. 시즈카타케(賤ヶ岳) 전투에서 분전하면서 칠본창(七本槍) 중에서는 최고의 공훈을 세웠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해, 솔선수범 하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서군에 속하면서 기후성(岐阜城)에서 농성하고 있던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산보시(三法師))의 구명(求命)을 요구하였고, 오사카(大坂) 전투에서는 참전하지 않는 등 오다(織田) 가문과 토요토미(豊臣) 가문에 대한 충성은 변하지 않았다.
  49만 8천석의 봉록에 봉해지지만, 1619년에 영지를 몰수 당하고 시나노(信濃), 나카가와지마(川中島) 등으로 유랑했다. 히로시마성(広島城)을 무단으로 수리, 축성했다는 죄로 영지를 몰수 당했지만, 마사노리(正則)를 두려워 한 토쿠가와 막부의 음모설이 유력하다. 1624년 사망


  (11) 후루타 시게카츠 (古田重勝, 1560-1606, 1020명)

  시게카츠(重勝)는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과 임진왜란에도 종군하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595년에는 이세(伊勢) 마쓰자카성(松坂城) 3만 5천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하면서 전 후 5만 5천석으로 영지를 늘리게 된다.


  (12) 오다 나가마스 (織田長益, 1547-1621, 450명)

  유우라쿠사이(有楽斎)라는 호(号)로 알려져 있으며, 오다(織田) 일족 중에서 가장 우아한 생애를 보낸 인물이다.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11번 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겐고로(源五郎)라고 불리었으며 장성한 후에는 나가마스(長益)라고 개명하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있어서는 13살 연하의 막내 동생인 것이다. 1582년 6월 2일, 혼노지(本能寺)의 변(変) 당시에는 노부나가의 적자(嫡男)인 노부타다(信忠)와 함께 니죠성(二条城)에 농성하고 있던 중 탈출에 성공한다.
  1584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격돌하였던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사자(使者)로서 활약하며 강화(講和)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무인으로서의 나가마스(長益) 보다도 문화인, 외교관으로서의 나가마스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다와라(小田原) 원정 이후, 나가마스는 출가입도(出家入道)하였고, 센리큐(千利休)에 사사(師事)하게 된다. 유우라쿠사이(有楽斎)는 센리큐 문제(門弟)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리큐칠철(利休七哲)의 한사람으로서 추앙받게 되면서 「유우라쿠류(有楽流)」의 다도(茶道)를 창시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 전 후 야마토(大和)에 영지를 하사 받는다. 오사카(大坂) 전투에서는 오사카성 안에서 토쿠가와(徳川) 측을 위해 활약한다. 토쿄(東京)에 있는 유우라쿠쵸(有楽町)는 유우라쿠사이(有楽斎)의 저택이 있던 자리로, 유우라쿠사이의 이름에 기인한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다. 1621년, 12월 13일 쿄토(京都)에서 사망하였다.


  (13) 카나모리 나가치카 (金森長近, 1524-1608, 1140명)

  미노(美濃)의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에게 사사하고 있었지만, 오와리(尾張)가 통일 되기 직전인 1559년까지는 노부나가(信長)에게 사사하게 되었다. 나가치카(長近)의 통칭(通称)은 고로하치(五郎八), 초명(初名)은 아리치카(可近)였는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사사하면서 장(長)의 한 문자를 받고 나가치카(長近)로 개명했다.

  나가치카(長近)는 1573년 아사이(浅井), 아사쿠라(朝倉) 토벌, 1574년 이세(伊勢) 나가지마(長島) 일향일규(一向一揆) 등에 참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1575년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는 사카이 타다쯔쿠(酒井忠次)의 부대로 참가하여 타케다(武田) 군의 병량고를 점령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에치젠(越前) 일향일규(一向一揆) 토벌전에서도 별동대로서 하라 나가요리(原長頼)와 함께 시나노(濃州)에서 공격해 들어가며 오오노군(大野郡)을 제압하였다. 이 군공(軍功)으로 인해 오오노군(大野郡)의 3분의 2를 하사 받고 오오노성(大野城)을 축성하게 된다.
  혼노지(本能寺)의 변(変)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사사하면서 3만 8천석에 봉해졌고 1590년부터 타카야마성(高山城)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 전 후에는 6만 1천석으로 영지를 늘렸다. 만년에는 출가(出家)해, 다도를 잘 아는 풍류인으로서 살았으며 1608년 8월 12일, 후시미(伏見)에서 사망했다.


  (14) 이코마 카즈마사 (生駒 一正, 1555-1610, 1830명)

  미노(美濃) 토다(土田) 출신.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의 아들.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사사하면서 1577년의 키이(紀伊) 사이가(雑賀) 공격에 종군하였다. 그 후 히데요시(秀吉)에게 사사하면서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2200의 이끌고 조선에 침공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버지와 반대로 동군으로 참전하면서 기후성(岐阜城)을 공략하였고, 전 후에는 본령(本領)인 사누키(讃岐) 17만 8백 여석의 영지를 보전할 수 있었다.


  (15) 토도 타카토라 (藤堂高虎, 1556-1630, 2490명)

  처음에는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에게 사사하면서 1570년의 시카와(姉川) 전투에도 출진하였다. 후에 오다 노부즈미(織田信澄),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순으로 주인을 바꾸면서 마지막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사사했다.
  이요(伊予) 사카지마성(板島城)의 성주로 8만 여 석의 영지를 소유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 전 후에는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 20만석을 하사받았다.
  타카토라(高虎)는 전투 뿐만 아니라 축성(築城)의 명인으로도 유명한데, 슨뿌성(駿府城) 등 많은 성의 건축에도 참여하였다. 자손은 이세국(伊勢国)의 성주로서 막부 말기까지 번성한다.


  (16) 쿄고쿠 타카토모 (京極高知, 1578-1622, 3000명)

  쿄쿄쿠 타카쯔구(京極高次)의 동생인 타카토모(高知)는, 부인이 시나노(信濃) 이다성(飯田城)의 성주인 모리 히데요리(毛利秀頼)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히데요리(秀頼)의 사(死) 후 이다성(飯田城) 10만석을 소유하게 된다.
  1600년, 타카토모(高知)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우에스기(上杉) 토벌에 종군하였고, 기후성(岐阜城) 공격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군공(軍功)을 세웠다. 전 후 단고국(丹後国) 미야즈성(宮津城) 12만 3000석을 하사 받으며 전봉(転封)하게 된다.


  (17) 테라자와 히로타카 (寺沢広高, 1564-1633, 2400명)

  히로타카(広高)는 히데요시(秀吉)에게 사사하였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위한 히젠(肥前) 나고야성(名護屋城) 공사를 분담하였다. 1596년 가독을 물려 받으면서 넓어진 영지로 8만석에 달했다. 또한 1602년까지 11년간 히데요시의 직할령인 나가사키봉행(長崎奉行)으로서 대외교섭을 담당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훈에 의해서 히고(肥後) 아마쿠사(天草) 4만석을 하사 받으면서 총 12만석의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후에 크리스트 교도들의 "아마쿠사(天草)의 난"에서 진압을 위해 하라성(原城)으로 병력을 출동, 진정시켰지만 난(乱)의 주모자였던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가 아들 카타타카(堅高)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주인이었기 때문에 아마쿠사(天草) 소유의 영지는 수공(収公) 되었다. 카타타카(堅高)가 돌연 자살하면서 테라자와씨는 3대에서 단절되고 말았다.

 

  5. 동군이었으나 전투에 불참한 장수


(1) 아리마 토요우지 (有馬豊氏, 1569-1642, 900명)

  셋쓰(摂津) 미타번(三田藩) 번주(藩主) 아리마 노리카츠(有馬則頼)의 차남. 치쿠고(筑後) 쿠루메번(久留米藩) 번주(藩主).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사사하면서 1595년 토토미(遠江) 요코스카(横須賀) 3만석의 영지를 하사받는다. 히데요시 사망 후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사사하면서 후시미성(伏見城), 요도성(淀城)을 수비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하면서 활약, 2만석의 영지가 증가되었고 단바(丹波) 후쿠치산성(福知山城)의 성주가 되었다. 전 후에는 슨뿌성(駿府城), 단바시노산성(丹波篠山城) 및 에도성(江戸城) 건축에 참여하였으며 오사카 전투에서도 활약하며 1620년에 13만석의 영지가 증가되면서 에치고(筑後) 쿠루메(久留米) 21만석의 영지를 소유하게 된다. 1637년 시미바라(島原)의 난(乱)에서는 아들 타다사토(忠郷)를 출진 시켰고 6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참전하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만다.
  1642년 쿠루메(久留米)에서 74세를 일기로 사망.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인(茶人)으로서도 유명해 리큐칠철(利休七哲)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고 있다.


(2) 야마노우치 카즈토요 (山内一豊, 1546-1605, 2058명)

  모리토요(盛豊)는 오와리(尾張) 슈고다이(守護代) 이와쿠라성(岩倉城)의 오다 토시노부(織田敏信), 노부야스(信安) 부자에게 사사하였고, 155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전투에서 패하며 전사하였다. 모리토요(盛豊)의 아들이 카즈토요(一豊)로 이와쿠라성(岩倉城)의 오다(織田) 씨가 몰락한 후 노부나가(信長)에게 사사하면서 히데요시(秀吉)의 배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1573년에는 오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서 400석의 영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후에 와카자마(若狭) 타카하마성(高浜城), 오미(近江) 나가하마성(長浜城)을 거쳐 1590년에는 토토미국(遠江国) 카케가와성(掛川城)의 주인이 되어 5만석을 받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토사국(土佐国) 코치성(高知城) 22만석에 봉해졌다. 카즈토요(一豊)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야스토요(康豊)의 아들인 타다요시(忠義)에게 가독(家督)을 물려 주었다. 야마노우치 카즈토요(山内一豊)의 부인 치요(千代)의 내조는 유명하다.


  (3) 아사노 요시나가 (浅野幸長, 1576-1613, 6510명)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의 장남. 키이(紀伊) 와카야마번(和歌山藩) 번주(藩主).
  1590년 오다와라 (小田原征伐)에서 첫 출진하여 공훈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눈에 들어 1593년 17세의 나이로 카이국(甲斐国) 17만석을 하사받게 된다. 그러나 1595년 토요토미 히데쯔구(豊臣秀次) 실각사건에 연류되어 노토(能登)로 유배되었다. 이케다 쯔네오키(池田恒興)의 넷째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동생인 와카노 만도코로(若政所)가 히데쯔구(秀次)의 첩이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토시이에(利家)와 네네(ねね)의 진언으로 이듬해 죄를 용서 받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 기요마사(加藤清正) 등 6인과 의기투합,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측으로 마음을 돌렸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하였다.
  전 후에는 쿄토(京都)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곧 키이(紀伊) 와카야마(和歌山) 37만 6천석을 하사받고 와카야마로 이동하게 된다. 1611년 니죠성(二条城)에서의 이에야스(家康)와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회견에서는 히데요리를 경호하기 위해 기요마사(清正)와 함께 동석하였고, 이 때 가슴에 몰래 칼을 숨겨 들어가 만일의 경우 이에야스(家康)를 죽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직후 사망한 기요마사(清正)와 마찬가지로 요시나가(幸長)도 2년 후인 1613년 8월 17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사망하였다.


(4) 이케다 테루마사 (池田輝政, 1564-1613, 4560명)

  쯔네오키(恒興)의 차남(次男). 오나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사사하며 각지를 전전(転戦)한다.
  1580년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의 모반(謀反)에 즈음해서는 아버지 쯔네오키(恒興)와 함께 약관 16세의 나이로 아라키(荒木) 세력을 공격, 56명을 베는 전공을 세우며 이름을 떨쳤다. 혼노지(本能寺)의 변(変)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 속하게 된다. 1584년의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아버지 쯔네오키(恒興)와 형 모토스케(元助)가 전사하면서 가독을(家督)을 계승하였다. 그 후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정벌과 큐슈(九州) 정벌에 종군하면서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의 15만석을 하사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 전 후에는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의 52만석에 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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