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966년, 아프리카의 가나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인 은크루마가 나라의 경제를 파탄시켰다며 군부가 개입해 대통령을 자리에서 밀어낸 것이다. 은크루마는 가나가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시절,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이끌던 반영세력의 독립투사였다.
  가나가 영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초콜릿의 원료가 되는 카카오 원두를 수출하여 생긴 막대한 이윤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유럽의 경제적 도움을 빌미로 압박해오는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로 접어들어 카카오 원두의 가격이 폭락하면서 국가 수입이 급감한다. 결국 가나의 단일 경작 경제는 파탄을 맞게 되고, 1966년에는 은크루마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한 사이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바뀌기에 이른다.

  가나를 독립시키는 힘이 됨과 동시에 가나의 경제를 무너뜨리게 된 카카오를 통해 약간의 지식을 공유해보자.


  2. 카카오 대량재배의 시작

  서론에서 카카오에 의존한 경제정책이 독립국가인 가나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잠깐 소개했었다. 하지만 이런 불행은, 이미 400년 전부터 카카오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어온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것이다. 카카오가 아프리카에서 재배되기 전에는 라틴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생산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 생산지로 끌려가 노예로 일했던 것이 바로 아프리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카카오 열매의 풍부한 영양가치에 주목한 에스파냐가 베네수엘라에 카카오 농원인 엥코미엔다(훗날의 플랜테이션)를 열어 카카오 재배를 시작하던 시기, 그곳의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대부분 학살되어 버리고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에스파냐는 대체노동력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남아메리카 카리브 해 연안지방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닮았다는 뜻에서 베네수엘라로 이름짓고, 1567년 그곳에 카라카스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런 이후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재식 농업을 위한 카카오 농장을 설하고, 거기서 수확한 농산물을 멕시코나 유럽 등지로 수출했다.
  17세기, 카라카스 주변에는 100개에 이르는 플랜테이션 농장이 있었는데, 각각의 농가에서는 100명 이상의 노예를 필요로 했다. 당시 베네수엘라에서는 "카카오 열매를 수출하고 아프리카 사람을 수입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1684년에 베네수엘라에는 37만 그루의 카카오 나무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1720년에는 무려 200만 그루로 늘어났고, 1744년에는 500만 그루로 증가하면서 18세기에는 카카오 열매와 노예무역의 전성기가 찾아온다. 한편 1684년에 16,000명 정도이던 노예의 수는 18세기가 되면 20만 명에 육박하게 된다.
  유럽 인의 인디언 탄압을 폭로하고 인디언 노예제 철폐를 주장하던 에스파냐의 역사가 '라스 카사스'는, "워낙 인디오의 수가 적었던 베네수엘라에서 많은 노예들은 심한 혹사를 당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400만 명에서 500만 명에 이르는 인디오가 살해되어 지옥으로 쫓겨갔다. 특히 독일인에 의한 혹사가 가장 심하다. 독일인들이 에스파냐의 무법자들보다 훨씬 더 잔혹하게 이 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에스파냐 왕실이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웰저 가에게 '아시엔토 데 네그로스(Asiento de Negros: 흑인 노예 교역 계약)'의 권리를 부여한 결과 일어난 사태였다.

  카카오의 플랜테이션은 17세기부터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3. 카카오 원두가 귀하게 취급된 이유

  크기에 비해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카카오 원두는, 오래 전부터 영양가 높은 식품으로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카카오는 코코아 분과 코코아버터, 그리고 카페인 성분의 자극제인 테오브로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코아 분은 카카오 원두를 볶아 가루로 빻은 것이고 코코아 분을 제조할 때 나오는 것이 코코아버터인데, 이 코코아버터는 카카오 원두의 56%를 차지하고 있다. 카카오 원두가 귀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그 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코코아버터 때문인데, 이것은 양질의 식물성 지방이기 때문에 인간의 체온에 쉽게 용해되고 소화도 잘 된다.
  그런가 하면 코코아 분은 식품으로뿐 아니라 화장품이나 의약품으로도 사용된다. 카카오 원두로 만드는 초콜릿은 카카오 원두의 가루인 카카오 분에 버터와 설탕을 가미해 제조한 것으로, 단백질과 지방이 융합되어 독특한 맛을 낸다.

  카카오의 원산지는 라틴아메리카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가 10m인 카카오 나무에 럭비 공 모양으로 생긴 열매가 열리는데, 길이가 10cm에서 30cm, 직경이 5cm에서 10cm인 이 열매 속에 들어 있는 20개에서 60개 정도의 콩을 카카오 원두라 부른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카카오 원두를 즙으로 만들어 마셔왔다. 이러한 풍습이 마야, 아즈텍으로 전해지면서 그들 역시 카카오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7세기경 유카탄 반도에서는 귀족의 독점하에 카카오를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서 재배했다. 농민에게 카카오 원두로 세금을 내게 했던 아즈텍 왕국 시대에는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콩 4알은 호박 1개, 10알은 생선 한 마리나 토끼 한 마리, 100알은 노예 한 사람에 해당하는 교환가치가 있었다.
  또한 아즈텍 국왕인 몬테수마 왕은 카카오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볶은 카카오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부어 하루에 50차례나 마셨다. 그것도 황금 컵에 따라 마셨다는데, 일단 한 번 사용한 컵은 다시 사용하는 법이 없이 궁전 근처 호수에 던져버리고 늘 새 컵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은 유럽인들은 아즈텍 왕국의 그 호수 바닥에서 황금 컵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애니메이션 '엘도라도'는 이 일화를 듣고 보물을 찾아 나선 두 청년을 소재로 하고 있다.)


  4.카카오의 유행

  몬테수마 왕이 카카오 원두를 마시는 것을 본 코르테스는 카카오 원두를 유럽으로 가지고 돌아가 에스파냐 왕실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그 습관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 습관이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코르테스가 전래한 이 열매와 관련해, 1590년에 발행된 아코스터의 <신대륙 자연문화사>에는 "카카오는 실로 요상한 음식이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는 글이 실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최근 유입된 코코아라는 음료는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그 끔찍한 자극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마시기에는 도저히 무리이다."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카카오라고 하면 달콤한 맛을 연상하게 되는데, 유럽 인들이 카카오의 맛을 달가워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몬테수마 왕을 비롯한 아메리카 인들이 즙을 낸 카카오 콩에 설탕을 첨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몬테수마 왕은 카카오 원두에 옥수수와 고추를 섞어 함께 빻은 뒤 거기에 뜨거운 물을 섞어 마셨다. 당시 설탕이 생산되지 않고 있던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음료수를 마실때에도 떫거나 매운맛을 가미해서 마시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런 맛이 유럽 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아메리카에서도 설탕 재배가 시작한다. 설탕의 최대 생산지인 발바도스 섬에는 1640년부터 전성기가 찾아온다. 그즈음 에스파냐 사람들이 카카오 원두에 설탕이나 바닐라를 첨가해 마시기 시작하면서 서유럽에도 카카오 열매가 보급된다.
  1606년에 이탈리아로 유입된 카카오는 1615년에는 프랑스로, 1650년에는 영국으로 전해지며, 17세기에서 18세기에는 에스파냐와 프랑스 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영국에서는 아예 초콜릿 하우스까지 지어질 정도였다.

  프랑스의 미식가인 '사브아랑'은 저서 <미식 예찬>에서 "카카오는 위 무력증, 만성병, 스트레스 등에 탁월한 자양 강장제이다."라고 서술하며 카카오를 마시라고 권장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간에서도 서서히 뿌리내리기 시작해, 19세기 초에는 영국 해군에서 250톤의 코코아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1828년에는 네덜란드 인이 카카오 원두의 코코아 분에서 지방을 제거해내는 기술을 발명해 맛좋고 소화 잘 되는 음료수인 코코아를 개발하였다. 이후 초콜릿 생산이 시작되고, 1876년에는 우유를 넣어 마시는 방법까지 개발되어 코코아의 수요는 더욱 확산되었다.


  5. 아프리카의 재앙

  코코아와 초콜릿 생산에 따른 카카오 원두 소비의 증가는 설탕 소비량도 더불어 증가시켰다. 게다가 18세기에 이루어진 커피와 홍차의 보급은 곧바로 설탕 소비에 불을 붙여, 마침내는 카카오와 설탕을 같이 생산할 수 있도록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1780년 한 해 동안에만 서아프리카의 골드코스트, 베닝, 카메룬 지방에서 44,500명의 젊은 노동력이 아메리카로 끌려갔다. 이 노예들은 대부분 전쟁포로여서 아프리카 인들간의 전쟁을 더욱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물건을 모두 가지면서 동시에 전쟁포로를 유럽인에게 돈을 받고 넘겨 돈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흑인들은 모두 1,500만 명이었다. 오는 도중의 중간 항로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포함하면 6,000만 명에서 9,000만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아프리카 땅을 떠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4,500만 명, 중간 규모 도시의 인구가 15만~25만 명임을 생각하여 비교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이후 노예무역을 금지하자는 목소리와 아메리카를 생산시장이 아닌 판매시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정책이 겹치면서 노예들의 수는 감소하고, 그 대신 카카오 재배의 중심지가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로 옮겨진다.
  아프리카에서의 첫 카카오 재배는 19세기 후반 가나의 아크라 근방 아크와핀에서 시작된다. 온도가 높고 습한 이 열대우림 지역의 기후가 카카오 생산에 적합했기 때문에 생산량은 과거 아메리카에서 재배하던 때보다 더 늘어났다.
  1891년부터 수출되기 시작한 카카오 원두는 1901년이 되면 가나 최대의 수출품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1914년에는 세계 총생산량의 절반이 서아프리카에서 산출된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남아메리카에서처럼 플랜테이션이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서아프리카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유럽 인들이 말라리아나 황열병으로 쓰러지는데다가, 영국이 간접 지배 방침을 세워 수확을 직접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영국은 이미 생산해놓은 카카오 원두를 헐값에 팔라고 강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한 영국인들의 강압적 태도에 가나 인들의 불만은 서서히 쌓여갔고, 마침내 그것이 폭발하면서 가나는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가나를 본받아 근처의 여러 국가가 동시에 영국에 반기를 들게 되었으며 영국은 국제회의를 통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시에 발을 빼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대충 줄을 그어 국가를 독립시켰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아프리카의 국경은 반듯한 일자 형태인 곳이 많으며 지금도 각 부족들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0년대는 가공농업을 위주로 하는 국가에겐 어려운 시기였다. 고무, 카카오, 사탕수수, 콩, 커피, 과일 등이 국제적으로 가격이 대폭락하기 시작하였다. 발빠르게 대응한 몇몇 국가 외에는 대부분이 국가의 경제는 물론 그 기반까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쿠데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역시 가장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곳은 아프리카였다. 유럽에서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인데다 자국을 도와줄 우방도 없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그래도 미국과 유럽에 약간의 국가이익을 양보하고 얻은 자금으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가까운 유럽에 손을 벌리기에는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이 국가들은 가공농업품의 값이 안정되기까지 10여년을 빈곤과 굶주림의 세월로 보내야만 했다.

  처음 언급했던 가나는 이런 아프리카 국가의 전형적인 산물이다. 15년간 반제국주의 투쟁을 하며 국민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던 은크루마는 졸지에 국가경제를 책임지지 못한 주범이 되어 실각하고 기니로 망명했다가 각국을 전전, 1972년 루마니아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가나에서의 쿠데타 때문인지 아프리카의 국가원수들은 외국을 방문할 때 항상 수많은 인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보통 대동하는 인원이 많을수록 그 국가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 왜 국제무대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는 아프리카에서 이런 일을 했을까? 우습게도 자신의 정권을 잃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국가원수가 외국을 방문하느라 나라를 비운 동안에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힘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모두 데리고 나온것이다. 독립영웅도 실각하는 마당에 자신들은 오죽할까라는 심리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6. 맺으며...

  카카오는 전세계 인구의 1/3이 음용했다고 할 정도로 널리 퍼진 식품이다. 맛이 달콤하여 어린이들도 좋아한다. 나 역시도 초콜릿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라 가끔씩 사먹는 편이다.
  하지만 카카오로 인해 아프리카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가 혹사당하고, 많은 국가들을 단일경제로 몰아넣으면서 경제적 혼란을 겪게도 만들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불안함을 가중시키는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편의점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고르는 초콜릿을 보면서 이 글을 기억해준다면 나에게는 상당히 보람있는 일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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