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원정을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영화 자체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게임 창세기전3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살라딘은 이름만 같을 뿐이지만, 사막에서 지속적인 게릴라전 이후 적절한 시기에 전면전을 통해 결국은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은 같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하틴 전투. 이 전투를 통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유태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땅을 잃었는지,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성지를 잃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따져보면 이슬람교의 성지도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전쟁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하틴 전투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슨 전략 전술의 묘를 다투는 것도 아니요, 어떤 우연에 의해 놀랄만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요. 어떤 놀라운 신무기가 튀어나온 것도 아니다. 이 하틴 전투는 역사상 자주 벌어졌던, 경쟁력 있던 군대가 그야말로 멍청하고 아주 한심하게 무너지고 만 그냥 하찮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1. 십자군 원정과 예루살렘 왕국의 탄생

  십자군 원정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더 부연설명을 하진 않겠다.
여러 군벌들이 설치고 있어 힘을 집중시킬 수가 없던 이슬람은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열어주었고, 1099년 7월10일 그리스도가 죽은 그 성스런 땅은 마침내 크리스찬들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눌러앉아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여기서 이 먼곳까지 와서 나라를 세운 이들의 운명적 고생이 시작된다. 성지를 회복했으니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과 그 주변의 소국들의 발목을 잡는 '인적자원부족'은 이들 국가의 태생적 한계였다. 건국 당시부터 서유럽의 지속적인 원조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국가였던 것이다.
  그래도 예루살렘 왕국은 서서히 그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조금씩이라고는 해도 원조가 아예 끊기는 일은 없었고, 순례자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나 동방무역상인들을 협박해 빼앗은 돈으로도 왕국을 그럭저럭 운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천만다행인 것이 이슬람 세계에는 이렇다 할 큰 힘을 가진 존재가 없어서 커다란 위협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2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이슬람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 세명을 연달아 배출하며 이 귀찮은 이방인들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세 사람중의 마지막 인물. 이라크의 지도자였던 사담 후세인도 선전용으로 써먹은 이슬람 최대의 영웅 살라딘의 등장으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의 운명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2. 살라딘의 등장

  살라딘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그는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다. 물론 그의 능력에 의심할 여지란 눈꼽만큼도 없다. 하지만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실패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의 경우를 보자면, 하늘이 영광의 길을 열어주었다라고나 할까.

  살라딘은 1137년, 오늘날의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쿠르드 족의 귀족인 나즘 앗 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살라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고, 해석하자면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이다.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십자군 운동 당시에 그에게 톡톡히 쓴맛을 보았던 기독교인들의 발음을 따른 것이다.

  1146년, 이라크-시리아에서 세력을 크게 키운 이마드 아딘 장기가 어이없게 살해되고 난 후, 그의 아들들은 죽은 아버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주를 벌였다. 그중 둘째 아들 누레딘(누르 알 딘)은 아비의 손에서 반지(=도장)를 빼내어 알레포로 달려가 거기 있던 시르쿠(살라딘의 숙부)의 도움을 받아 기반을 다졌다. 이후 누레딘은 장기를 이어 더욱 영토와 영향력을 확장하며 시리아의 패자가 되었다. 물론 그가 가장 신뢰하던 오른팔은 바로 그 시르쿠였다.

  이 때 이집트를 지배하던 시아파 이슬람 파티마 왕조는 그 영광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 풍요로운 이집트를 쥐고 있었지만 주변국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허수아비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루살렘 국왕들과 누레딘도 이런 이집트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는 있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너무도 위험부담이 큰 원정이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도 시르쿠는 여러차례 누레딘을 설득했고 결국 3번에 걸친 원정, 예루살렘 국왕 아말릭과 업치락 뒷치락 끝에 결국 이집트를 정복하여 그의 주군에게 바치려는 그 영광스런 순간에! 

  이집트 정복 불과 3개월만에, 누레딘을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으로 섬기던 시르쿠가 과식으로 죽고 만다. 그럼 이집트는? 벌써부터 그의 오른팔로 활약하던 조카 살라딘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 20대 후반 쿠르드족 청년은 자기 아버지나 삼촌과는 달랐다. 그의 가슴속에는 뜨겁게 야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누레딘과의 접촉을 피했다. 어차피 둘 사이에는 예루살렘 왕국이 버티고 있어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 누레딘이 마음먹고 쳐들어오지 않는 한 그를 피해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자신들의 종교 수장인 칼리프를 쫓아내고 들어앉은 이 수니파 청년에게 고운 눈길을 보낼 이집트 귀족들이 아니었다.
  살라딘은 언제 등뒤에서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가시방석에 앉아서 그 살기등등한 누레딘의 눈총을 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예전엔 그의 아버지의 중재로 형식적으로나마 주군인 누르 엣딘을 위해 이집트를 통치한다라는 꼴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아유브도 죽어서 없고, 아무리 누레딘이 인자하다고 소문이 나 있지만 이 말 안듣는 신하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었다. 둘의 갈등이 커져만 가고 있던 1174년의 어느날...

  그 무섭던 누레딘이 느닷없이 죽어버렸다. 후두염이었다. 어김없이 뒤따라 벌어지는 자식들의 권력투쟁.
  살라딘이 어떻게 하면 저것들을 주워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이곳저곳 눈치만 살피는데, 누레딘의 뒤를 이어 38살 밖에 안된 예루살렘 국왕 아말릭도 덩달아 죽고 만다. 원인은 이질이었다. 게다다 그의 후계자는 13세의 어린 소년인 것도 모자라서 나병환자란다.
  이제 살라딘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누레딘이 이룩했던 왕국을 흡수하며 이슬람의 패자로 급부상했다. 이제 겨우 30대 후반.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그는 인생의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3. 위기의 예루살렘

  살라딘에게는 경쟁자를 죽이는 기운이 있는 것일까? 1186년 8월, 예루살렘 왕국은 또 한명의 국왕을 잃었다. 볼드윈 3세와 아말릭 및 볼드윈 4세까지 한명도 마흔을 넘겨보지 못했고 치세 20년을 넘겨보지도 못한채 하나 둘씩 계속 죽어나가더니, 이제는 8살짜리 국왕 볼드윈 5세까지 죽어버렸다.
  사실 볼드윈 4세는 책임감과 열정은 있었으나 몸이 말을 안들었던 탓에 특별히 잘못한 일이나 잘한 일도 없다. 그에게는 살라딘처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볼드윈 4세의 유언에 따르자면 이제 왕국은 섭정인 트리폴리 백작의 손에 놓여졌다. 볼드윈 4세는 그 자신의 말년에 섭정이었던 '기 드 뤼지냥'을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후계자의 섭정직은 자신이 어릴 때 그 역할을 수행했던 트리폴리 백작에게 맡겼다. 물론 그렇다고 트리폴리 백작이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통치권이 몇년은 유지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중요한 시기에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매파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린 왕의 유해는 물론 예루살렘까지 상대편에게 넘어가 버렸다. 그는 발리안 이벨린의 영지인 네블루스에서 왕국의 귀족들을 소집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주교 헤라클리우스의 주도로 시빌라 공주의 대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또 하나의 관을 남편인 기 드 뤼지냥의 머리에 얹었다. 왕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국왕의 탄생이었다. 이 둘은 아스칼론을 불법으로 차지하고는 거기 눌러앉아 있다가 볼드윈 5세의 사망소식을 듣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었다.
  성 요한 기사단은 나름대로 저항했으나 예루살렘은 벌써 레날 샤틸롱과 매파의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소수였으나 상대보다 한발 앞서가고 있었다.


<킹덤 오브 헤븐에 나왔던 시빌라 공주와 기 드 뤼지냥의 대관식>

  이 소식을 전해들은 트리폴리 백작과 귀족들은 대응책을 의논했다. 그냥 밀어버리자는 사람도 있었고 대관을 했으니 포기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그들은 아말렉의 또 다른 딸, 시빌라의 배다른 동생 이사벨라를 떠받들어 내전을 벌여보자고 결의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의 남편이 줄행랑을 쳐버렸다. 어차피 그는 레날의 양자였고 선이 굵지 못한 연약한 남자였다. 그는 왕이나 부군이 되고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구심점을 잃어버린 귀족들은 동요했다. 몇몇 귀족들은 트리폴리 백작에게 왕위를 권하기도 했으나 그는 정색을 하며 사양했다. 결국 트리폴리 백작은 귀족들을 볼드윈 4세와의 맹약에서 풀어주었다. 어쩔 수 없이 매파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었다. 여러 귀족들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새로운 왕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남은 것은 백작과 볼드윈 이벨린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이에 분개한 볼드윈 이벨린은 왕국과 영지를 버리고 안티오크로 떠나갔다.

  한편 중병에 걸렸었던 살라딘은 언제 아팠냐는 듯이 왕성한 기력을 다시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아래 뭉쳐진 이슬람의 칼날이 왕국을 향하고 있던 이 때, 예루살렘 왕궁에는 이교도를 치고 땅을 되찾자고 외치는 매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살라딘을 자극했다. 레날이 조약으로 보호해야 할 이집트 상인들을 습격한 것이었다. 결전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4. 전초전

  레날이 야기한 조약파기는 살라딘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분열되어 약해진 적이 불가침조약까지 파기하면서 처들어 오라고 하니 이렇게 기쁠수가! 살라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 준비는 한걸음 한걸음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한편 트리폴리 백작령과 안티오크 군국(君國)은 이번 사건은 자기들과는 아무던 관계가 없다며 살라딘과의 조약이 유효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적의 분열은 나의 힘. 살라딘은 당연하게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답해 주었다.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살라딘이 처들어오게 생겼는데, 왕국의 제1귀족들이 보조를 맞추고 있지 않은 것이다. 여러 귀족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발리안 이벨린이 나섰다. 그는 국왕 루시냥에게 트리폴리 백작이 없으면 왕국은 끝장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원래 좀 줏대가 약한 루시냥은 모든 일을 발리안에게 맡겼다.

  발리안과 두 기사단의 단장들이 트리폴리 백작을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아주 재수 없게도 이들은 트리폴리 백작령을 지나던 살라딘의 부하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성 요한 기사단(The Knights Hospitaller) 단장은 숫자가 상대가 안되니 그냥 조용히 지나가자고 했지만 성당 기사단(The Knights Templars) 단장에게는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동료를 놔두고 그냥 도망갈수 없던 그들 모두는 승산없는 전투를 벌였고 오직 3명만이 도망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성당 기사단 단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이 있어 늦게 출발했던 발리안 이벨린은 다행히 이 사건에 연관되지 않았다.

  이 일로 트리폴리 백작의 행방이 결정되었다. 더 이상 살라딘과의 조약에 얽매이고 있다가는 배신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왔다. 안티오크에서도 원군을 보내주기로 했다. 예루살렘 왕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군이 모이게 되었다.


  5. 실책

  살라딘은 약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갈릴리 바다(티베리아스 호수)로 접근해 왔다. 그는 티베리아스 성을 포위 공격해 들어갔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전략회의가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트리폴리 백작은 지금은 여름이니 이 뜨거운 태양 아래 저 대군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고 기다리면 알아서 물러갈 것이다고 하였다. 그는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항상 매파에 휘둘리는 국왕은 매파의 주장대로 결국 출전을 명령했다.

  일단 이들은 녹지가 펼쳐진 세포리아에 주둔해서 상황을 살폈다. 이때 포위된 티베리아스를 지키던 트리폴리 백작부인으로부터 구조요청이 왔다. 그녀의 아들들은 티베리아스를 구해달라고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전략회의가 다시 열렸고, 트리폴리 백작은 정면 승부는 절대 안된다는 자신의 의견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살라딘도 약 2만을 헤아리고, 유리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역시나 국왕은 군대를 움직였다. 그는 자신을 국왕으로 밀어올린 매파의 요구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예루살렘 군은 티베리아스 호수로 진군했다. 7월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길은 온통 모래길에 우물도 말라붙어 마실 물도 없었다.
  그들이 하틴 근처에 다다른 것이 7월3일 해질 무렵. 신전기사단에서 더 이상의 행군은 무리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왕은 여기서 밤을 보내자고 말했다. 트리폴리 백작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여기서 멈추면 언덕 아래에 살라딘이 기다리고 있는데다가 병사들은 전부 목이 말라 죽게 되니 빨리 물을 구할 수 있는 티베리아스 호수로 가야한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국왕은 주변에 지친자들을 위해 행군을 멈추었다. 트리폴리 백작은 외쳤다. "전투도 하기 전에 우리는 끝장이다. 왕국은 쓰러졌다."

  그날 밤, 살라딘은 군대를 움직였다. 게다가 불을 피워 공기를 더욱 건조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 군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발견한 것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이슬람의 깃발이었다.


  6. 전쟁의 결과

  전투자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은 없다. 전쟁에서 밥보다 더 중요한 물을 마시지 못한 병사들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완전 포위된 상황. 트리폴리 백작과 이벨린 발리안을 비롯한 소수만이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지역방어를 포기하면서까지 긁어모았던 예루살렘 왕국의 총병력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조각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던 진짜 십자가.
물론 살라딘의 전리품이 되었다>

  국왕 루시냥과 성당 기사단 단장을 비롯한 여러 고위귀족들은 정치적 군사적 이유로 포로로 남았다. 매파의 수장이자 살라딘이 증오하던 레날 샤틸롱은 그의 눈앞에서 목이 날아갔다. 이슬람과의 싸움이 삶의 목표이던 종교 기사단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노예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살라딘은 이 전투를 통해 십자군을 물리치고 이슬람교의 성지를 되찾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