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의 임금 경종

  숙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경종의 순탄치 못한 삶은 '장희빈의 아들' 이라는 한마디에 함축되어 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와 국왕의 총애를 놓고 다투던 숙종 때는 조선 전기간에 걸쳐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거듭됐는데,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가의 여인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가의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의 부상과 몰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현모양처와 악처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리전이었다. 실제로 역사서나 실록 등을 봐도 이 두 사람에게 쉴새없이 드나드는 정치인들과 대리인들을 볼 수 있다. 귀양중인 인현왕후에게도 드나드는 판국에 궁중에 있는 장희빈에게는 오죽했으랴.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숙종에게 왕자를 안겨준 여인이 바로 희빈 장씨이다. 숙종이 이 왕자를 원자(자신의 첫째 아들로 세자의 잠정적인 전 단계)로 정호하려 하자 서인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갈아치운 후 남인에게 정권을 주면서 원자 정호를 강행하는데, 이 때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원자로 정호한 왕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로 훗날 경종이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 왕권이 약하였다. 중국 황제들은 신하들에게 떠받들어야 할 존재임에 비해,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왕은 대체로 집권당을 몽땅 갈아버리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인현왕후의 폐위도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인현왕후는 서인 집안의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왕의 이런 물갈이가 반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는데 서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희빈 장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남인에 대해 서인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한 결과,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그후 몰락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둘로 양분된다. 남인들을 강하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노론이고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그녀 소생인 세자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여버린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연산군 시절과 같은 살육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실록에도 과거 연산군의 예를 들어 후세를 생각한다면 세자를 바꾸라고 간언하였다는 부분이 있다. 숙종 또한 모후가 사형당한 한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과 노론의 대신 이이명은 숙종 43년(1717)에 이른바 '정유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유독대의 합의사항은 숙종의 와병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이복동생, 즉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밀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한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34세였던 경종은 노론의 이 주장을 받아들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이는 세제를 정사에 참여시키라는 말로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주청이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禁言)이었다. 국왕이 세제에게 대리시키겠다고 해도 신하들은 죽어도 안 된다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신하들이 먼저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의 인물인 목호룡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 이이명 등 노론의 사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면서 노론은 몰락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인옥사다.


2. 경종의 사인(死因)

  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학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 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연잉군이 즉위하자 전국 각지에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나붙었다. 심지어 군사 이천해란 인물은 즉위한 연잉군, 즉 영조가 능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으며  영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는 이천해의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 이라며 사관에게 싣지 못하도록 명해서, 실록에는 다만 "들을 수 없는 말(不忍之言)" 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영조는 이천해는 물론 경종 시절 자신을 핍박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사형에 처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가 "네 목을 베어 대행대왕(경종)의 빈전에 바치겠다." 라고 꾸짖자 "나도 선왕(경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오!" 라며 반발했다. 경종의 충신은 영조가 아니라 자신들이란 뜻이었다.
  급기야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강경파가 경종의 복수를 내걸고 영남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군사는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군이 모여 곡을 했다. 영조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경종독살설은 다시 재연된다. 국문당하던 소론인사가 "나는 갑진년(경종이 사망하는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 라고 경종 독살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 논쟁은 틈만 생기면 재연됐다. 경종 독살설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급기야 사도세자에게까지 여파를 남겼다. 재위 31년에도 독살설이 나돌았다면 당시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다른 왕조에 비해 유난히 독살설이 많기도 하였다.


3. 사도세자의 정치적 입지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경종독살설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태생적 한계상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분명히 노론이 선택했기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영조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택군(擇君)논쟁'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즉위한 후 경종 때의 임인옥안에 자신이 역적으로 등재된 것에 부담을 갖고 이를 뒤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영조는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노론과 함께 과거 음울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만약 경종의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려던 소론 강경파의 계획이 성공했으면 그는 왕위는커녕 사형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부왕과는 처지가 달랐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도 정치적 입지나 후원자가 없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이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이 했던것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다.

  사도세자는 노론에 불만을 느꼈다. 조선은 사실상 노론의 나라란 생각이 들었다. 부왕 영조가 힘겹게 이끌어오는 탕평책은 한계가 보였다. 부왕 자신이 경종 시절에 노론에게서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자신을 공격했던 소론에 증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투서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책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두 사건은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을 무너뜨렸고 노론은 이 기회를 이용해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영조 또한 이에 동조해 두 사건을 역모로 처리한 후 그해 10월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하는데 그 내용은 경종 시절부터 두 사건에 이르기까지 노론을 포함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경종독살설의 한 재료인 게장은 대비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올린 것이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이는 권력자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4.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

  사도세자는 소론이 연일 죽어나가는 두 사건의 와중에 노론의 사건확대책에 반대했다. 그는 되도록 두 사건을 온건히 처리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처신이 노론의 결정적인 반감을 사게 된다. 부왕 영조가 분노하는 나주벽서사건에서조차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것을 본 노론은 세자의 정치견해가 소론이란 결론을 내리고 세자를 몰아내기로 한다.

  세자빈인 혜빈 홍씨는 누구 못지 않은 노론이었다. 혜경궁 홍씨라고도 불리는 혜빈 홍씨의 친정은 유명한 노론 가문이었다. 그녀의 조상인 홍주원은 선조(宣祖)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정명공주의 부마였으니 당연히 서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자신의 딸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 덕택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딸이 세자빈이 된 후 김상로 등과 함께 집권당인 노론을 이끄는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인적 기질에다 강한 성격을 지닌 사도세자가 소론의 처신을 보이며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의 외척인 풍산 홍씨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세자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당론을 좇아 세자를 제거하느냐였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 혜경궁 홍씨는 세자를 버리기로 했다.
  이처럼 세자의 외척까지 세자가 소론이란 이유로 제거의 길로 나서는 판에 여타 노론 중진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 노론 영수 김상로, 홍계희, 윤급 같은 노론 중진 다수가 이에 가담했다.

  사도세자는 안팎에서 고립됐다. 소조(小朝:세자궁)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노론의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대조(大朝:영조)에서는 정순왕후와 후궁 문씨가 세자를 헐뜯었다. 조정의 노론 대신들은 호시탐탐 세자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런 포위 속에 위험을 느낀 세자는 자구책으로 병을 위장한다. 미행(微行)을 통한 기행으로 자신의 허점을 보임으로써 노론의 예봉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세자의 자구책은 이런 소극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소론과 연합하는 적극적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세자는 우의정을 역임했던 소론 영수 조재호와 비밀리에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5. 노련한 정치인 혜경궁 홍씨

  세자가 의문의 관서지방으로의 여행에 나선 것도 소론과 결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평안감사 정휘량이 소론이자 사돈 사이였으므로 연합하려 했는데, 정휘량이 홍봉한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론에 세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세자는 관서행을 계기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공세를 신속한 기동력으로 막아낸다. 그러자 노론은 드디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경언의 고변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주로 세자의 개인적 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변 전후의 사정으로 볼 때 그 핵심 내용은 개인적 비행이 아니라 군사 행동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즉 세자가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역모 고변의 성격을 띤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9일 후인 영조 38년 윤5월13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죽었다. 세자가 죽던 날 영조는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개인적 비행이라면 종사까지 들먹였을 리가 없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치공세에 희생되었다는 점은 세자와 연합한 소론 영수 조재호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셋째 날 조재호가  세자와 결탁했다며 영조에게 고해 바친 인물은 다름 아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한 의도를 단지 자서전 쯤으로 읽었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정치적인 부분은 잘 읽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때는 뒤주의 비극이 발생한 영조 38년(1762) 직후가 아니라 순조 5년(1805) 이후다. 즉 이십 후반의 청상과부로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한중록>을 서술했다는 말이다.

  홍씨가 '한중록'을 서술한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의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해서이다. 홍씨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날부터 급전 직하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란 이유에서였다. 실제 그녀의 오빠 홍낙임은 정조를 축출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련된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그녀의 친정은 대리청정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다시 한 번 단죄되었는데, 그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비로소 가문의 신원에 나서서 한중록을 작성한 것이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란 말을 입증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6. 정조의 역습

  경종이 「장희빈의 아들」이란 말로 상징화된다면 정조의 삶은 '사도세자의 아들' 이란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세손(정조)을 처리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노론은 세손마저 제거하고 싶었으나 영조는 세손을 이미 죽은 사도세자의 이복형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면서 세손의 지위를 유지시켜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적자에게 왕위가 계승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어린 세손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론에는 세손의 즉위를 막는 것이 사도세자의 즉위를 막는 것만큼이나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한다면 노론이 어떤 화를 입을 것인지 눈에 환했던 것이다. 노론은 세손도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구도에 제동을 걸고 나선 노론 실력자가 있었다. 바로 세손의 생모 혜경궁 홍씨였다. 그녀는 남편 사도세자는 버렸지만 아들은 버릴 수 없었다. 그녀가 세손 제거에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서자 홍봉한은 배후로 빠지는 대신 그녀의 숙부 홍인한이 세손 제거의 총책으로 나선다.
  영조가 사망하기 석 달 전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은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 며 노골적으로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뜻을 공표한다. 그러나 손자까지 죽일 수 없었던 영조는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노론을 위협하며 세손의 대리청정을 강행하고 석 달 후 사망한다. 이로써 대리청정하고 있던 세손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이다.

  정조는 법적으론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양자로 입적한 효장세자의 아들로 즉위했으나, 즉위 당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하고 나선다. 당연히 사도세자에 반대했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인다.
  정조는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작은외조부 홍인한을 숙청하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김상로를 삭탈관작했다. 또한 정순왕후의 동생 김귀주를 귀양보내고 김상로처럼 이미 죽은 홍계희 대신 그의 아들 홍지해 등을 귀양보내고 영조의 후궁 문씨를 사사, 그 오라비 문성국을 사형시킨다. 노론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었으나 이  숙청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 인사에 국한된 것이었다.
  정조는 아마도 노론이란 당파 자체를 숙청하고 싶었으나 노론은 이미 조정과 전국 각지의 모든 것을 장악한 실력파이자 집권당이었다. 그들을 숙청하더라도 노론을 대신할 만한 정치세력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7. 규장각과 수원성을 세운 이유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노론을 대신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양성할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 이후 정권에서 소외된 영남 지역 사대부들을 위로함으로써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즉위 직후 자신의 침실 지붕에까지 노론에 매수된 자객이 침투하는 사건이 생기자 위협을 느껴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강화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해 노론도 등용함으로써 노론의 격렬한 반발을 막는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친위 세력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재위 13년 10월에는 양주 배봉산에 묻혀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 화산에 이장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시신을 이장한 것은 단지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인 현릉원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노론의 서울인 한양을 떠나 새로운 세력 기반을 만들려 한 것이다. 수원 화성이 현릉원 근처에 건설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조 재위 20년(1796)경 1차 완성된 수원 화성은 정조와 남인 실학자 정약용 등의 새 나라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정조는 승하하기 전해인 재위 23년에도 화성 행궁에 머물렀다가 현릉원에 가서 몸소 제례를 행하는 등 화성 강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승하한 해인 재위 24년 1월 정조는 현릉원에 가서 땅을 치면서 목메어 울먹였다. 신하들이 진정하라고 청하자 "경사를 당하여 선대를 추모하는 중에 크나큰 아픔이 북받쳐 올라서 그러는데, 어찌 차마 나더라 진정하란 말인가." 라고 했다. '경사'란 그해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가례를 올린 것을 말한다. 사도세자의 손자가 세자로 책봉되고 가례를 올린 경사에,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니 아픔이 북받쳐 올랐다는 말이다.

  정조는 당시 장용영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 등 경기 일대를 방어하는 친위부대인 장용외영을 확장해 병력은 이미 2만여명으로 늘어 있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이 볼 때 이는 엄청난 위협이자 공포였다. 만약 정조의 왕권이 자신들을 쓸어버릴 정도로 강화된다면 그는 서슴없이 그 길을 택할 인물이란 판단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어린 나이부터 장장 14년 동안이나 효장세자의 아들로 행세하다가 즉위 당일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한 인물이 정조였다. 그에게 막강한 힘이 집중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노론은 두려워했다.


8. 의료진을 불신한 정조

  노론의 이런 위기감이 팽창하는 와중인 재위 24년 6월 정조가 급서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의 발병 원인은 종기다.
  정조가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불러 진찰을 받은 것은 6월14일, 이때까지만 해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종기가 계속 번지자 6월24일에는 연훈방(烟熏方)을 사용했다. 그날 밤에는 정조가 잠이 들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요에까지 번진 양이 몇 되가 넘었다고 한다. 26일에도 연훈방을 사용한 후 증세가 조금 호전되는 듯하다가 경옥고를 마시니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승하하는 28일 아침  진맥을 청하자 정조는 "오늘날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는가."라고 의료진에 불신을 표한 후 진맥을 받았다. 그날 진맥을 받고 탕약을 마신 후 정조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때 나선 인물이 왕대비 정순왕후였다.

  "이번 병세는 선왕의 병술년(영조 42년)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드시고 효과를 보셨으니 의관에게 의논해 올리게 하시오." 라는 정순왕후의 말에 따라 성향정기산 두세 숟갈을 입 안에 넣었으나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인삼차에 청심환을 개어서 입에 넣어도 넘기지 못했다. 의관이 진맥을 한 후에 엎드려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왕대비 김씨가 나섰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나시오."
  심환지 등이 잠시 문 밖으로 나온 후 왕대비가 들어갔는데 조금 뒤에 방 안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28일 저녁이었다.

  정조의 죽음을 기록한 <실록>에 따르면 그의 죽음을 최초로 확인한 인물은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다. 영조의 계비였던 그녀는 친정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정조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즉위하자마자 그녀의 동생 김귀주는 유배 보내 결국 정조 10년에 귀양지 나주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법적으로 말하면 정조와 모자지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원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날 경우 뒤를 이을 세자의 나이가  열한살이었다. 당연히 그녀가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정순왕후는 정조가 죽어야 사는 객관적 처지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진정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는지 죽이기 위해 올렸는지는 그녀만이 아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건장한 신체의 정조가 종기에 쓰러졌다는 점과 정조가 죽자마자 섭정을 한 정순왕후에 의해 정조 재위 기간 내내 배척되었던 그녀의 친정이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는 점에서 의혹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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