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시간이 남아서 한 달 전부터 벼르던 '라이프 오브 파이'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그 때 보고 싶었던 영화는 '레미제라블'과 '호빗'이었는데, 막상 개봉하고 나니 '라이프 오브 파이'와 '주먹왕 랄프'에 더 관심이 가더군요. 예전부터 그런게 좀 있었습니다. 보고 싶다가도 개봉하면 웬지 발길이 안가는 영화와 갑자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드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후자였습니다.
  '주먹왕 랄프'는 의정부CGV에서 이미 내려갔으므로 '라이프 오브 파이'를 선택했습니다. 상영시간표를 보니 실질적으로 볼 수 있는건 오늘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시간편성이 모두 점심 아니면 심야더라구요. 아주 운이 좋았습니다.

  의정부 CGV는 갈때마다 시설을 참 잘 만들어놨구나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오후 5시쯤에 가니 직원과 관람객이 반반씩인 상황이 은근히 어색하면서도 흥미로웠습니다.
  표를 2시간전에 미리 예약해뒀기 때문에 바로 예매권을 뽑았습니다. 상영관에서 딱 가운데가 10~11번이었는데 10번을 고르면 왼쪽에 2자리, 오른쪽에 4자리가 남는 안좋은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보러 가는 사람은 당연히 11번을 골라서 왼쪽에 3자리, 오른쪽에 3자리로 맞춰야 합니다. 커플은 다른 자리에서 보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 해놓으니 왼쪽엔 여자3인 일행, 오른쪽엔 여2+남1 일행이 와서 앉았습니다. 관람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확보했으므로 기분좋게 보도록 합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포레스트 검프'를 생각나게 합니다. 자기는 의도하지 않았던 환경에서 자동적으로 이것저것 해결책을 찾으며 끊임없이 신에 대한 질문과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들이 약간의 코믹요소와 함께 보여집니다.
  작품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두가지 요소가 종교와 이성인데 이것을 주인공인 파이의 부모님이 한쪽씩 대변합니다. 아버지는 결국 중요한건 종교가 아니라 과학과 이성임을 파이에게 항상 강조하고 어머니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을 느끼며 자신의 길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어린 시절의 파이는 신을 좀 더 믿어서 힌두교, 천주교, 이슬람교를 모두 믿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영하는 동물원에 새로 온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와 처음 대면하면서 어느쪽이 옳은 길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가족 전체가 동물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해 살기로 결정하고 배에 몸을 실었지만 큰 폭풍우를 만나면서 파이는 가족들을 모두 잃고 구명보트에 다리를 다친 얼룩말, 하이에나, 바나나더미를 타고 표류하다 구명보트에 올라탄 오랑우탄, 그리고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남게 됩니다.   얼룩말은 곧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히고 오랑우탄은 하이에나와 싸우다가 물려 죽습니다. 하이에나는 호랑이가 제압하면서 보트엔 파이와 호랑이만이 남습니다.
  그 후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 위급할때에 파이와 호랑이를 살 수 있게 해준 아름답지만 절망적인 식인섬, 그리고 한계에 다다랐을때 멕시코해안에서 구조되어 살게 된 내용들을 인터뷰하러 온 작가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끝부분에서 파이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족이 이주하려고 탄 배에 있던 기분나쁜 요리사가 구명보트에 함께 남은 다리를 다친 선원의 다리가 썩어가자 다리를 잘랐는데 곧 죽었고, 바나나더미를 타고 표류하다가 구명보트에 올라탄 어머니를 그 요리사가 죽였으며 자기가 요리사를 죽이고 혼자 남아서 표류하다 멕시코 해안까지 흘러와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하이에나(요리사), 얼룩말(선원), 오랑우탄(어머니), 호랑이(파이 자신)까지 넷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겁니다.

   이 영화는 극한상황에 처한 사람이 종교와 현실에 대면하는 것을 표류라는 상황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표류중에 보여지는 파이와 호랑이가 사실은 파이의 종교적인 면과 현실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명보트에 올라타고 며칠간은 호랑이가 계속해서 강세를 나타내죠. 파이는 그 옆에 임시뗏목을 만들어서 겉돌고 도망다닐 뿐입니다. 이것은 파이가 극한상황에서 어쩔줄을 몰라서 그가 믿던 힌두교의 신, 천주교의 신, 이슬람교의 신에 의존하며 있었다는 거죠.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식량과 물이 모자르게 되면서 파이는 호랑이를 길들여서 살아갈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뗏목에만 앉아서는 살 확률이 적으니까요. 이때부터 파이의 현실적인 상황이 종교적 신념을 넘게 되는겁니다. 신에게 아무리 기도하고 소리쳐봐야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을 구할건 자기 자신 뿐입니다.

  식량도 슬슬 떨어져갈때 다시 한번 폭풍우가 몰려옵니다. 파이는 신의 힘을 직접 봐야 한다며 구명보트에 절반정도 덮여있던 흰 천을 모두 걷어내고 호랑이를 끌어냅니다. 하지만 이내 겁을 먹고 보트 전체를 흰 천으로 덮은 후에 그 아래 웅크린채로 벌벌 떨며 호랑이에게 미안하다고 계속 되뇌입니다.
  이것을 본인은 파이가 극한상황이 되자 다시 한번 신에게 의지하게 되지만 곧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자신의 이성으로 신에 대한 믿음을 모두 감싸버리게 되는 장면이라고 봤습니다. 처음에 호랑이가 지배하던 보트였지만 지금은 흰 천으로 둘러치고 그 아래서 파이와 호랑이가 함께 떨고 있을 뿐입니다.

  가진 식량도 모두 잃자 파이는 먼저 죽어가는 호랑이를 껴안고 우리는 곧 죽을거라며 웁니다. 하지만 미어캣이 가득한 섬에 닿으면서 파이는 해초와 나무뿌리 등 먹을거리를 잔뜩 얻어서 배에 싣고, 호랑이 역시 미어캣으로 충분히 식사를 하지만 이곳은 밤이 되면 모든 물이 산성으로 변해서 사람을 집어삼키는 식인섬이어서 곧바로 떠나야 했다고 합니다. 떠나면서 바라본 섬은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즉, 파이는 살기 위해서 자기가 죽인 요리사를 먹었을겁니다. 섬의 모습이 누워있는 여자인건 의미심장합니다. 구명보트에 탔던 여자는 파이의 어머니 뿐이었으니까요. 과연 요리사의 인육만으로 멕시코 해안까지 살아서 생존할 식량이 됐을까...

  파이는 마지막까지 호랑이를 버리지 않고 데려갔습니다. 중간에 호랑이가 물에 빠졌을때도 결국 건져내서 살렸고, 식인섬에서 떠날때도 호랑이를 기다려서 태우고 떠났습니다.
  호랑이가 파이의 종교적인 부분을 상징한다고 보면 이건 파이가 어떤 상황에서도 신에 대한 구원을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적적으로 지나가는 선박이 구해준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구명보트는 멕시코 해안까지 도달합니다.
  해안가에 파이가 내려서서 바로 쓰려졌을때 호랑이는 파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해안가의 밀림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인터뷰하는 작가에게 동물이야기와 현실이야기중에 어느것이 더 좋냐고 물어보죠. 작가는 동물이야기가 좋다고 합니다. 호랑이가 떠나는건 결국 파이가 생존을 위해 기대했던 신의 구원이 없었으므로 그 부분을 버렸음을 뜻합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희망으로 믿었던 신이 이제 쓸모가 없어졌으므로 버린거죠.

  동물이 등장하는 신비한 표류기와 현실인물들이 서로를 죽이고 식인까지 하는 표류기. 이 영화는 두가지 모두 관람객이 생각할 수 있도록 열린 결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열린 결말중에 본인이 비극적인 현실을 신과 동물에 빗대어 파이가 얘기했다고 생각하는건 중간중간에 나오는 아름답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광경들 때문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인데 맑은 호수처럼 수면에 파동 하나 없이 고요하다거나, 낮에는 미어캣이 가득한데 밤에는 물이 산성으로 변해서 모두 죽는 알려지지 않은 섬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미어캣은 그런 좁은 섬에 사는 동물이 아니죠. 바다 한가운데인데 아무런 파도와 수면파동 하나 없는거도 말이 안됩니다. 이것들은 파이가 자기가 생존하며 겪은 비극적인 일들을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당히 종교의 기적으로 바꿔 생각하며 타협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셈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종교나 신념을 그 자신들은 얼마나 진실되게 믿고 있는가 하는 물음... 그러니까 파이의 표류기를 통해 종교적 믿음과 신에 대한 경외감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믿음과 의심은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감독이 표현하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관람객들은(적어도 본인에게 있어서는) 그 두가지의 경우를 이 영화를 통해 다시 생각해보고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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